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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Aug 16. 2022

둘째는 없다.

<모성애의 발명>을 읽고 


8살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1차적 생존 육아에서는 벗어난 터라 이제와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일단 사두긴 했으니)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숙제처럼 읽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벡이 남편(울리히 벡)에 비해 얼마나 책을 가독성 좋게 쓰는 분인지도 새삼 깨달았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에서도 남편이 쓴 부분보다 아내인 엘리자베트가 쓴 부분이 훨씬 잘 읽혔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1) 출산율을 높이고 싶은 공무원, 2) 아내가 왜 아이 낳기를 꺼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남편, 3) 아이를 낳았으나 행복하지 않아서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초보 엄마, 4) 아이를 낳기 싫은 자신의 촉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비출산 여성들에게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자매가 있어서 좋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자매든 남매든 만들어주고 싶어서 둘째를 고민하던 내가 남편의 둘째 반대를 설득하지 않고 동의한 이유가 이 책에 다 써져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설파하며 '이성'을 발견(발명?) 했을 때, 인간은 역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공동체에서 벗어나 산업혁명이 마련해준 직장에 나가 돈벌이를  하며 개인의 인생행로를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범주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문', '집안', '공동체' 단위로 삶을 일구어가던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쪼개지면서 남성은 집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 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는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부르주아 계층에 해당되는 이야기고, 대부분의 하층 계층의 여성들은 언제나처럼 일도 하면서 아이도 돌보아야 했다.)


그 시기 폭발하는 지식체계는 여성이 집 안에서 아이 돌봄을 전담해야만 하는 수많은 근거를 만들어 낸다. 모성이라는 개념,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돌보는데 더 적합하다는 주장이 바로 이 시기에 지식을 등에 업고 '발명'된 것이다. 그전에 아이는 '작은 어른', '미래의 노동력'에 불과했지, 지금처럼 금이야 옥이야 감싸고 키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배우고 익힐게 많아진 근대의 특성상 아이가 자라 생산성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예전보다 더 많은 교육을 하고 규범을 내재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부분을 떠맡은 것이 바로 여성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별분업이다. 


우리는 모두 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러니까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삶이 대단히 의미 있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무엇인가 한다는 것, 자신의 삶의 행로를 스스로 개척한다는 것. 불안을 감당하며 배우고 성장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근대가 인간에게 안정감을 빼앗아간 대신 선사한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 선물을 받지 못하고 가정에 머물게 되었다. 어차피 밖은 정글이니 안락한 가정에서 아이나 잘 키우라며. 가정에 갇힌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비'라는 책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950년~60년대 여성들에게 교육 기회가 확대되고, 새로운 여성 운동이 등장했다. 그리고 여성의 직업활동이 증가하는 변화가 있었다. 교육의 확대는 자신의 처지와 적극적인 대결을 가능하게 하고 독립성을 불러일으키는 교육 내용을 접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학교는 나만의 인생에 대한 요구와 강요를 위한 훈련소가 되었고,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하게 상급 교육 과정에 들어가면서 점수와 자격증을 얻기 위한 경쟁, 즉 성취의 압박과 조기 경쟁 속에 편입되었다. 이제 여성도 남성들처럼 사회에서 나가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교육기회의 균등으로 교육 기회의 균등이란 남편의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고 아내의 열세를 고착하는 교육의 우위가 사라졌다.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은 가장 빠른 삶의 목표로 결혼이 아니라 다르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은 과거보다 훨씬 나은 기회들을 가짐으로써 내용적으로 만족스러며 경제적으로 자신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일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여성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격을 인식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 노동이다.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여성이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논증하며, 여성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 여성도 실존주의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1949년에 출간된 이 책은 여성들에게 타인의 삶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여성들에게도 직업활동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돈은 여성을 바깥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성들은 더 많이 배우고 사회에 진출했다.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에서 경쟁하고 성취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순간 어머니의 삶은 여전히 아이 중심으로 바뀌기를 강요받는다. 1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출근하던 날의 복잡한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육아휴직 기간 내내 다시 출근하는 날 (= 아이 없이 혼자 나가서 밥 먹고 어른과 대화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으면서도 동시에 무엇인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찜찜한 마음. 아이가 8살이지만 여전히 내내 그러하다. 아이에게도 회사일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계속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저 약자에 대한 작은 배려를 바라는 발언들이 '맘충'으로 매도되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노 키즈존' 이 늘어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현실의 규칙은 아이에게 적대이면서 동시에 사회는 아이가 이상적인 존재로 자라기를 바란다. 표준 분포표의 평균은 그저 한 점(혹은 선) 일뿐인데, 그 평균의 오른쪽(평균 이상)에 아이가 자리하거나 최소한 그 평균의 근처에는 있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으로 아이를 대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지만 평균은 그저 평균일 뿐이다. 그러나 육아의 영역에서 평균은 '정상성'으로 둔갑해버린다. 그리고 그 왼쪽(평균 이하)에 자리한 아이를 바라보며 너무나 쉽게 그 어머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아이의 성적은 물론 성격, 외모, 키, 기타 여러 가지 재능, 생활습관 모두 엄마가 알아보고 독려하고 지도해야 하는 영역이다. 


어머니가 되기 전에 여성은 개인으로서 삶을 살아왔다. 근대 사회의 교육은 우리에게 목적의식적으로 인생행로를 설계하고, 기회를 폭넓게 이용하여 장애물을 예측하여 피할 것(169쪽)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는 삶을 기꺼이 살아왔다. 이런 기준에서 아이는 명백한 장애물이다.  근대의 노동 세계는 신속한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노동력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투입할 것을 요구한다. 중단하거나 쉬거나 노동시간을 축소하는 사람은 언제나 막대한 손해를 예상해야 한다. (179쪽)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회에서 낙오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된다. 결국 많은 어머니는 슈퍼우먼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나는 회사 생활을 10년쯤 하고 출산을 했다. 한참 일을 하던 중간에 1년을 쉰 셈이다.라고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지금의 직장은 운이 좋게 육아를 하는 워킹맘에게 호의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그러나 복직하고 달라진 점은 그 전처럼 '예 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내 일에 몰두했을 때, 만약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가 5살 되던 해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왔더니, 배변 훈련이 끝난 아이가 숨어서 속옷에 똥을 싸는 퇴행을 보였던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지금의 일이 나의 적성에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일을 할 때 온전히 일만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양가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하원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엘리자베트 벡은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듯이 하원 도우미와의 관계조차 내 일이다. 이런 부대낌 속에서 늘 불편한 마음으로 회사생활을 하는 나에게 남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직장생활 3년 차쯤에 아이를 낳았더라면 한참 일을 배울 시기에 휴직을 해야 해서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일을 어느 정도 하게 된 다음에 휴직을 해서 다행이었던 거 아니야?"


회사에서 대리도 달리 전에 아이 두 명을 낳고 복직한 여자 후배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라며 전한 이야기에 나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직장인에게 과연 휴직하기에 적당한 시점이란 게 언제일까? 너는 언제 휴직하면 괜찮겠니? 네가 해볼래? 임신을 여자밖에 할 수 없으니 그냥 손해보고 무리해서 하는 거지 휴직에 적당한 시점은 없어!"  그리고 아이가 1학년 입학할 때 휴직할 것을 요구했더니 "커리어상 지금 휴직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라며 나를 한 번 더 분노하게 했던 이어지는 일홛 있다. 


똑같은 'K-직장인' 입장에서 지금 연차에 1년을 휴직하지 못하는 그의 선택을 100번, 천 번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똑같이 부모가 된 입장에서 내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점점 더 밀려나는 기분에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현실이 조건이 현재와 같은 한, 이 나라의 아이들이 학교에 늦게 등교 하고 낮에 일찍 학교 하는 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존재하는 어머니가 신화로 미화되고 직장이 있는 어머니들이 냉혹한 어머니로 낙인찍히는 한, 아버지들이 가사에 참여할 자세를 거의 보이지 않고 육아휴직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맡겨지는 한,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여성에게 위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엄청한 모험을 의미한다.
오늘날 여성들이 먼저 자기 삶의 토대를 확실히 하고 난 다음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거나 결국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통찰의 결과인 것이다.

모성애의 발명 201쪽


그래서 최근의 출산율 저하가 너무*100 이해가 된다. 신자유주의라는 단어조차 진부해진 2022년의 시기에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시기에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는 것은 여성의 삶에 재앙이다. '네이트온 판'이나 맘 카페에 보면, 돌봄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내를 가스라이팅하는 남편의 사례( ex.아내에게 네 핸드폰 비를 왜 내가 내야하냐고 한다든가...)들은 넘처난다. 그리고 돌봄의 1차적 주체가 거의 대부분 여성인 사회에서 여성이 일을 하려고 할 때 이미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기를 하는 입장이 된다. 


여성도 1인분의 성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고 싶고, 또 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육아의 부담이 어머니에게 쏠리는 지금 여성들이 비출산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성성의 신화'로 더 이상 여성들을 어르고 달랠 수 없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엘리자베트는 남녀평등 없이는 출생률 증가도 없을 수 없다(222쪽) 고 단언한다. 출산율을 증가시키기 위해 동반자 관계, 남녀평등, 여성 해방이라는 대안을 내놓는 것은 1970년대의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학자들이다. 한 달에 10만 원씩 양육 수당을 주고, 아이를 낳았다고 출산 축하금 100만 원을 준다고 해서 출산을 결정하는 여성은 없다. 


문화가 변하고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것이 모험이자 삶의 위협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환경,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억울함에 비명 지르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다시 여성들은 아이를 낳기를 선택할 것이다. 여성들의 발의 모래주머니를 남성이 그리고 사회가 나눠서 차야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세상이 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평생직장의 사라짐, 비정규직의 증가 등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의 심화로 인해 삶의 불안의 심화되는 지금 그 분노를  여성들에게 쏟아내는 이대남과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기성세대 남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출산율이 계속 낮아지는 게 맞을 것 같다.


이건 사족인데... 어차피 먹고살만한 직업도 사라지는데 굳이 인구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서 문제라고 하는데, 그럼 나이 든 사람들이 더 오래 일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인생은 60부터라고 하는데 (그때까지 가능하지도 않은 게 문제지만) 정년퇴직 연령이 꼭 환갑 즈음이어야 하는가? 미래 세대가 없어서 문제인 것은 소비자가 사라지는 시장의 문제가 아닐까?  그리고 시장이 문제라고 느끼면 그제야 소비자를 늘리기 위해 저출산을 벗어날 수 있는 정책들을 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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