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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미 Jan 10. 2024

42세 여인의 제대로 된 생일 파티


매 해 생일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생일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바로 집시 아이들과 같이 생일 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바로 며칠 전 새해라고 집시들을 위해 음식을 나누었고 또 무료 진료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1월 5일, 내 생일에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집시 아이들을 만난 지도 벌써 5년째. 갓난아기였던 아이들이 자라서 어린이가 되었고 또 몇몇 아이들이 있는 가정들은 더 이상 우리 지역으로 오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익숙한 많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아이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올해 생일은 금요일이었다. 매주 금요일은 내가 인도 소식을 후원자와 지인들에게 보내는 날이기 때문에 가장 바쁜 날이다. 소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내 맘은 벌써 집시들이 있는 들판에 가 있었다. 

소식을 전해야 하나 집시 아이들을 만나러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컴퓨터를 닫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생일날 꼭 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바로 집시 아이들이랑 생일 파티를 하는 거야. 나 인도 소식은 일단 나중에 보내는 걸로 할게."


남편은 웃으며 나를 보내줬다. 내 마음이 이미 아이들에게 가 있는 것을 눈치챈 듯 한 미소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에 있는 제과점에 갔다. 가장 큰 초콜릿 케이크를 고르고 인도 길거리 음식 '사모사'를 50개 샀다. 

들판에 도착하니 벌써 나를 보고 칸찬이 달려온다. 5살 칸찬. 칸찬은 내 손에 있는 케이크가 무거울까 봐 내 손을 꽉 잡고 도와줬다. 그 뒤로 달려오는 꼬마들. 

그렇게 들판에 앉았다. 몇몇 어른들도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 우리 쪽으로 왔다. 나는 케이크를 꺼내면서 애기 엄마들한테 말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그래서 생일파티 하러 왔지요."

그랬더니 목소리 큰 아기 엄마가 텐트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른다.

"오늘 마담 생일이래요. 다들 빨리 와요."

순식간에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모였다. 꼬마들은 케이크 주위에 앉아 벌써부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녀석들. 노래를 불러야 맛있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겠지.

나도 아이들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잘하지 못하는 영어로 나를 위해 생일 축하를 불러줬다. 가사도 정확하지 않지만 노래 불러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노래가 끝나자 순간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촛불을 끄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다 같이 후 하고 부는 거야. 하나 둘 셋~~~" 

그러자 아이들은 신이 나서 다 함께 후~ 하고 촛불을 껐다. 

케이크를 나눠주고 사모사를 나눠주자 아이들은 얼굴에 몸에 크림을 묻혀가며 케이크를 먹었다. 


케이크에 있는 촛불이 하필이면 내 나이 숫자 42 모양이었다. 다른 촛불을 사려니 마땅한 게 없어서 숫자로 산 건데 그 숫자를 보더니 애기 엄마들이 한 여인을 가리키면서 나와 나이가 같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닌가. 동갑을 만난 것이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당장 달려가 '친구~' 하고 반갑게 안아줬다. 쑥스럽게 미소 짓는 그 여인에게는 딸이 있었고 손자가 있었다. 그렇게 나이를 서로 확인하다 보니 집시 가족들에 많은 어른들이 내 나이 또래 거나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었다. 

42세는 그런 나이였다. 엄마 아빠라 불리는 나이. 인도에서는 할머니라고 불릴 수도 있는 나이. 

우리는 한참을 웃으며 서로의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사이 꼬마들은 케이크 박스와 케이크 받침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크림이 잔뜩 묻혀 있는 케이크 받침대가 뭐가 좋다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여인들이 말했다. 

"우리 오늘 떠나요. 기차를 타고 다시 말다 지역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 며칠 또 다른 지역으로 가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가고."

그랬다. 그들은 집시들이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사람들. 

나는 여인들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대부분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구걸을 하고 남자들은 꿀을 따서 팔거나 귀를 파주는 일, 알 수 없는 약을 만들어 판다고 했다. 

매번 그랬듯이 나의 생각들은 그들의 삶을 존중해 주는 것과 그들의 삶을 바꾸어 주는 그 사이에서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가야 했고 아쉬운 마음에 여인들을 꼭 안아주고 작별인사를 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혹시 두 달 뒤에 다시 올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때 봐요." 집시들은 서운해하는 나를 위로했다. 

나는 스쿠터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100미터도 가지 않아 길가에 다시 멈췄다. 

'아. 아이들을 안아주지 못하고 왔어. 아이들을 꼭 안아줄걸. 이제 가면 올해 가을에나 볼 수도 있을 텐데.'

잠시 고민하다 오토바이를 돌려 집시들이 있는 강가로 갔다. 

집시들은 내가 다시 온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어서요."

그리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칸찬을 안아주었다. "칸찬. 건강해. 보고 싶을 거야." 그 모습을 보던 그 목소리 큰 아주머니는 또 소리를 질렀다. 

"여기 마담이 안아주고 있으니까 빨리 와." 그러자 눈이 예쁜 루빠가 달려왔다. 

"루빠. 건강해." 그렇게 한 명 한 명 달려오는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수줍은 얼굴을 하며 내게 걸어오는 3살 남짓한 꼬마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그림 그릴 공책과 크레파스를 선물해야지. 다음에는 힌디어 공부를 좀 더 많이 해서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지. 그리고 더 많이 안아줘야지.' 


아쉬움 가득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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