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있으면 되는데 뭘 자꾸 그렇게 할라 그래
또다시 영감이 샘솟는 퇴근길, 오늘도 하루가 다 지났네. 아니, 사실 업무 시간이 끝난 것뿐이고 아직 하루의 끝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 남았지만,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 나로서는 내일 다시 출근해서 사무실 책상에 앉기까지 아무런 생각도 하기가 싫어. 그래서 밤이 되어 불 끄고 침대에 들어가 눕는 것처럼 난 퇴근 후에 내 뇌의 전원을 끄고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버릴 거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는 이미 끝난 거지.
오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월요일로 시작을 했어. 출근하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서 재택근무를 해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겨우겨우 나를 설득해 침대에서 끄집어내어 씻기고 준비시키고 제시간에 문 밖으로 내보냈단 말이지. 저번 주에는 아침마다 5분만, 10분만, 하다가 매번 계획보다 조금 늦게 출근했었어. 우리 회사는 출근 시간에 그렇게까지 엄격하지는 않은 편이라 5분이나 10분 늦는 건 별 일 아닌데, 뭐랄까 나는 내가 정한 시간을 지키고 싶거든. 그러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시간 맞춰 집을 나섰고 그래서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단 말이지. 날씨도 오랜만에 다시 보드라운 봄 날씨에, 더 기분 좋아져라 상쾌한 노래를 들으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섰는데 말이지…
요즘 이 도시는 한창 공사 철인가 봐. 여기저기 공사를 시작해서 트램이 제대로 가는 일이 없어. 아니나 다를까 회사로 가는 트램은 내가 늘 타는 정거장에 오지를 않고, 그나마 그 근처로 가던 트램마저도 10분 거리를 아주 뱅뱅 돌아 30분은 걸리더라도.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트램에 올라 타 버린걸. 그냥 단념하고 팀 단톡방에 조금 늦는다고 알리고, 괜찮다는 답변에도 몇 초라도 일찍 도착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했어. 겨우겨우 오전 회의에 늦지 않게 도착했고, 반쯤 빠진 정신으로 오전을 어떻게 보냈나 몰라. 그러다 보니 자잘한 실수가 있었고 오후엔 실수하기 싫어서 더 많은 신경을 쏟아야 했어. 세시에는 어김없이 텐션이 떨어졌고 그때부터는 또다시 스스로를 밀어붙여서 겨우겨우 퇴근시간까지 엉덩이를 붙잡아둬야 했지. 월요일이니까, 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하루였어. 상쾌하고 기분 좋은 월요일이라는 건 직장인에게 존재하지 않는 건가 봐.
그래도 퇴근하고 나니 기분이 좋다. 날씨도 좋고, 아직 해도 중천에 떠있고. 집에 가서 저녁으로 뭘 먹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얼른 집에 가서 옛날 예능 하나 틀어놓고 저녁 먹으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 같아.
요즘 참 그럭저럭 살아. 별일 없이. 고작 트램때문에 몇 분 지각한 게 별일이 될 정도로.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회사도 예전보다는 덜 괴롭고 (그렇다고 출근이 즐겁지는 않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저녁도 나쁘지는 않아. 뭔가를 해내고 싶어서 아둥거리던 지난 한 해가 있어서였을까, 당분간은 이렇게 존재감 없이 살아도 평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아. 물론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하지는 않아. 근데 괴롭지도 않아. 즐겁고 설레는 일은 없지만 힘들고 버거운 일도 없어. 그냥 이렇게 수많은 먼지 중에 하나로 살아가는 것도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좋지는 않지만 그게 내 운명이라면 그냥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살다 세상을 떠나면 참 허무하고 후회되는 것도 많겠지. 그건 진짜 싫은데… 근데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텨 내다 보면 끝이 날 것만 같아.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참 웃긴 건 이렇게 별일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무얼 해볼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1일 1 사진을 찍을까,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 볼까, 어디로 여행을 가볼까. 지금 쓰는 이 글도 그 다양한 생각의 결과의 하나지. 시리즈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으니까. 왜 나는 이렇게 계속 뭘 하고 싶은 걸까. 아무것도 안 하고 살면 편할 텐데. 그런 욕구 자체가 없으면 힘든 일도 없을 텐데. 가만있으면 되는데 뭘 자꾸 하려고 드냐는 장기하의 노래 가사가 귓가에 맴돌아. 나는 그냥 가만히는 못 사는 사람인가 봐.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고 싶어 하고 내 속에 쌓인 이야기를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어 해. 나는 아직도 사춘기인가 봐.
작년 한 해를 바쁘게, 나름 욕구 충족을 하며 살아본 결론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거야. 하고 싶은 게 있고, 머릿속에 맴도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게 너무나 초라한 것이라 걱정이 되고 준비가 반도 안되었다 해도 일단은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게 모두에게 진리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나의 삶에는 적용이 되는 것 같아.
물론 오늘 저녁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낼 테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게 이미 회복이 되고 있다는 뜻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