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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Jul 21. 2021

[햇-마:당 presents] 언제나 내 곁에

사랑하는 이와의 예기치 못 한 이별, 그리고 남겨진 흔적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고등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늘 일로 바쁘셨다. 외동딸이던 어머니는 나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의 양육과 모든 집안일을 외할머니의 손에 맡기셨고 그러다 보니 우리의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보다 외할머니와의 기억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고 누구보다 젊게 지내시던  외할머니는 지난 4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삼 남매에 있어 할머니의 존재는 엄마보다도 더 엄마 같았던 분이셨기에 갑작스러웠던 소식만큼이나 우리에게 닥친 슬픔은 너무나 컸다. 어느덧 석 달이 지났고, 그동안 흘린 눈물만큼 마음의 정리는 많이 된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는 한 가지는 바로 외할머니가 해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예상치 못했던 이별은 집안 곳곳에 쉽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냉장고엔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담가 놓으신 장아찌와 김치들이 가득했고, 한국에 계신 엄마는 냉장고에 남아있는 할머니의 흔적에 그 무엇보다도 힘들어하셨다. 어릴 적 삼 남매와 부모님을 포함하여 총 여섯 식구였던 우리 가족을 먹이시느라, 또 주변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던 특유의 외향적인 성격 탓에 외할머니의 손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컸다. 늘 집안이 북적대던 시절이 지나고 두 손녀딸은 해외에, 막내 손주마저 서울에 나가 살아 먹여야 할 입이 셋뿐이었던 최근까지도 여전히 할머니의 음식은 항상 푸짐하고 넉넉했다. 엄마는 종종 할머니의 큰 손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수고스럽게 한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끝내 상해서 버리게 되는 상황이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감정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할머니가 남기고 떠나신 흔적을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마주해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또 그런 할머니의 흔적이 점점 사라져 감을 느끼면서 엄마는 얼마나 흐르는 세월을 붙잡고 싶을까.


    어느덧 해외에 나와 산 지도 15년이 훌쩍 넘었다. 해외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공수해 오는 물품의 개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항상 출국 날 아침 나를 깨우는 소리는 박스테이프를 찍찍 뜯어내는 소리였다. 할머니가 직접 담근 된장과 그 집된장으로 만든 깻잎 장아찌, 빛깔 고운 고춧가루 등 해외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할머니의 정성으로 준비한 식료품들은 한국에서 갖고 돌아오는 짐에서 늘 빠지지 않는 필수 품목들이었다. 이제 와 참 후회스럽게도 그때의 나는 이런 걸 왜 귀찮게 굳이 보내냐며, 다른 짐에 냄새가 밴다고 할머니에게 투덜거렸고, 내 투덜거림이 늘어갈 때마다 그 음식들을 감싸는 테이프도 두꺼워져만 갔다. 아침부터 찍찍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오늘이 공항 가는 날임을 깨달으며, 그것이 얼마 남지 않은 행복인 줄도 모르고 참으로 오만하게도 그 소중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다.


    돌이켜 보면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수많은 끼니가 나를 성장하게 했고, 그래서 더더욱 음식과 연관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세포마다 각인된 듯하다. 맛있는 식사를 하며 느꼈던 만족감과 행복, 그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마련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기억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 그때 먹은 음식이 이룬 내 살과 뼈에 저장되어 있다. 비록 할머니가 해 놓으신 음식은 하나둘씩 상해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할머니가 남겨 놓으신 흔적은 내 몸 곳곳에 남아,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내 곁에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July, 2021]



이 글은 햇-마:당 에디션 Take-out! 에 소개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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