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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Jul 21. 2021

[햇-마:당 presents] 세렌디피티, 우연한 발견

우연한 발견을 통해 돌아보는 여행의 의미

1.

비행기를 타는 일은 늘 설렌다. 한국과 유럽을 오가는 11시간 남짓의 비행도, 유럽 내의 2시간가량의 비행도, 나에게는 모두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해외에 오래 살다 보니 비행기 탈 일이 잦아 갑갑한 내부와 특유의 건조한 공기, 늘 실망스러운 기내식에 익숙해졌음에도, 나는 아직도 비행기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창밖 구경을 하기 위해 가능하면 창가 자리를 사수하여 비행을 즐긴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비행의 묘미는 항공사마다 제공되는 기내 잡지다. 비행기를 타고 자리에 앉아 좌석벨트를 착용한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좌석 앞 파우치에 구비되어 있는 잡지를 꺼내어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는 일이다. 장시간 비행을 할 때는 몇 번이고 같은 글을 다시 읽기도 하고 좋은 내용을 따로 메모하거나 사진으로 찍어 저장해놓기도 한다. 그 잡지 속에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와 평소라면 관심도 안 가질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 아마도 평생 갈 일이 없을 어느 도시의 레스토랑 정보 등 잡다하고 무작위적인 정보가(물론 마케팅의 목적으로 누군가가 선별해서 넣은 정보이지만) 가득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꼭 한두 개쯤 유용하거나 매우 흥미로운 정보를 찾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기내 잡지를 훑어보는 일은 대부분의 여행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나만의 루틴이 되었다.



2.

특별한 계획이 없는 주말, 넷플릭스를 한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다. 다양한 영화와 시리즈물, 내가 “좋아요”를 누른 것을 바탕으로 내 취향에 따라 큐레이션 된 콘텐츠들이 즐비하지만, 딱히 손이 가는 것은 없다. 유튜브로 옮겨가 보아도 마찬가지. 이미 본 것이거나 내 시청 기록과 연관된 영상이지만 전부 비슷비슷하고 도통 흥미가 가지 않는다. 분명 내가 어릴 적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라고 하지 않았나. 갈수록 내가 접하는 정보들의 범위가 좁아지는 느낌이다.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내 성향과 관심사에 맞는 관련 콘텐츠를 보여주는 것은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내 시야가 좁아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비단 온라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이가 한 살 더 늘어갈수록 만나는 사람들은 다 나와 취향이 엇비슷한 사람들이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 역시 굳이 말하자면 한 번 필터링 된 이야기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 좋아하는 상점, 좋아하는 노래 등 내 취향이 확고해지는 만큼 그 외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은 덜해진다.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내가 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지내기 딱 좋다. 그렇게 정제된 나의 세상은 편안하고 거슬리는 게 없어 마음은 편하지만, 새로운 것에서 오는 설렘은 없다. 물론 매 순간 두근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살아있음을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3.

예전에 피렌체로 혼자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나는 여행 계획을 빡빡하게 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내가 갈 곳을 미리 정해놓고 움직이는 편이다. 여행 전 미리 알아본 미술관에 가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전시실을 지키고 있던 한 직원 할아버지가 나에게 창가로 와 보라며 손짓했다. 오전이라 방문객도 얼마 없어 무료하던 차에 눈에 들어온 동양 여자애가 작품을 뚫어져라 보는 게 신기했나 보다. 이태리어 사이 드문드문 들리는 몇 단어의 영어로 짐작건대 여행객인지를 묻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창문 밖의 구도심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찍어가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신다. “Map! Map?” 지도가 있냐는 건가? 가방에서 종이지도를 꺼내니 (그 당시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어느 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뭐라뭐라 말씀하신다. 여기, 여기, 엄지 척. 아, 여기를 가 보라는 건가 보다. “Grazie”하고 웃으며 화답한 후, 바이바이. 푸근한 할아버지의 인상 때문이었을까, 계획했던 오후 일정을 변경해서 할아버지의 추천 장소로 가보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곳이고 여행 책자에도 나오지 않은 곳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추천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한적한 골목에 늘어선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미소 띤 친절한 사람들.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정말 맛있었던 젤라토 집과 광장에서 체스 두던 사람들. 유난히 영어가 안 통하던 그 길에는 기분 좋은 우연한 발견들이 가득했다. 이런 게 여행이지, 광장 벤치에서 젤라토를 음미하던 그 순간의 감정. 십 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아직도 초콜릿처럼 꺼내먹는 소중한 기억이다.


4.

나는 요즘 여행이 간절하다. 코로나로 인해,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여행다운 여행을 떠난 게 1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회사 일에 조금 지친 탓도 있지만, 점점 일상에 권태로움이 찾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평일 낮엔 회사 일을 하고, 저녁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주말엔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주변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거나 주변 도시를 다녀오기도 한다. 물론 하루하루가 제각기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온하지만 지루한 나날들. 내일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는 사실이 편안함에서 지겨움으로 변해가는 그때,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물론 여행을 간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새롭지는 않겠지만, 내 예상 범주에서 벗어난 일이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그것만으로 여행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헤매는 길 위에서 찾아올 기분 좋은 우연한 발견, 세렌디피티를 기다려본다.


[June 2021]



이 글은 햇-마:당 에디션 Trampoline 에 소개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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