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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콜H Mar 07. 2021

직업의 위기_Part 1. 나는 무얼했나?

원하든 원치 않든 시장은 변한다. 고로 내 일도 변한다

세상 물정은 잘 몰라도, 무슨 위험이 닥쳐오고 있는지는 느꼈다


이전 직장은 잡지사다. 흔히 말하는 '외지(외국 잡지)', 업계 용어로 '라이선스 지(해외 유명 잡지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한국판을 발행하는 유형)'보다 순수하게 국내에서 시작한 '로컬 잡지'로 성장한 곳이다. 40년 넘게 로컬지 중심의 잡지사를 운영하는 일은 정말 녹록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전 직장에 대해 존경심과 자부심을 가진다.


오래된 회사의 장점은 많은 경험과 에셋이다. 거꾸로 오래된 회사의 단점은 그 많은 경험과 에셋이 짐이 되어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시 회사의 가장 큰 과제는 '새로운 웹, 모바일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그 회사에서 어시스턴트로 일을 시작해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고 있었고, 시장 환경의 변화가 회사에 압박이 된다는 것은 곧 내 직업이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매거진 산업의 위기는 흔한 이야기였다. 경력 10년을 넘긴 선배 에디터들은 '그래도 종이 잡지는 안 망한다'고 밥 먹듯 이야기했다. 언제, 어디서나 잡지를 보는 사람은 있다고. 잡지가 없어질 일은 없다고 말이다. 잡지의 호황기를 겪은 선배들은 영광의 지난날을 곱씹으며 늘 하던대로 한달치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초짜 에디터인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다가 그 회사에 입사한 게 스물 일곱살 때였다. 편집부의 심부름꾼인 어시스턴트에서 인턴으로, 인턴 에디터에서 정식 에디터가 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스물 아홉. 졸업한지 6년이 됐는데 내 수중에 모은 돈은 하나도 없었고 마음은 급했다. 그렇게 겨우 내 자리를 찾은 줄 알았는데, 내가 몸담은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다니? 실제로 내가 일하는 동안 광고 수익이 점점 떨어지는 게 보였다. 잡지는 점점 얇아졌고, 폐간되는 경우도 있었다. 광고는 잡지의 거의 유일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회사에서 가장 굳건한 수익을 담당하고 있던 매거진조차 광고 수익이 점점 줄더니 급기야 적자를 목도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지면 광고 시장의 하락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출처 : GroupM


단순히 내가 다니던 회사가 망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점점 더 많은 광고주들이 매거진에 들이던 돈을 빼내 인스타그램, 유튜브 광고에 쓰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뜻인가? 회사가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몇 년 후면 내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증거였다. 난 이제 막 이 일을 시작했는데! 연차가 쌓이면 선배들처럼 내가 정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직접 선택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인상을 남길 만한 인터뷰 기사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멋진 삶을 훔쳐보며 거기에서 받은 감동을 독자들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아무도 잡지에 돈을 쓰지 않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적은 보수를 받고' 하는 건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얘기는 다르다.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새로운 움직임을 찾고, 취재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그 현상과 이야기를 빈 종이에 글로 적는 일. 그 일을 하면서 월세를 내고 밥을 사먹고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경험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돌파구를 직접 찾기로.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서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가거나, 내가 지금 있는 환경을 그렇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두려움이 이끈 액션, 하지만 결과는...흠


위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직 준비다. 그때까지만 해도 글은 계속 쓰고 싶었기 때문에(혹은 다른 표현 기술은 가진 게 없어서?) 온라인 매거진 중심으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동안 썼던 기사들 중 괜찮은 것을 골라 포트폴리오 정리를 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미디어 직종을 체크하고 이력서를 등록하고 채용 소식을 뒤져보았다. 단순한 생각이었다. 아무도 종이 잡지를 읽지 않고, 웹이나 모바일로 기사를 읽으니까 온라인 매거진 정도로 타협하면 에디터라는 직함으로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한국 서비스를 론칭하고 주목을 받던 온라인 매체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 일정과 해외 취재 일정이 겹쳐 기회를 날렸다. 크게 아쉽진 않았다. 페이퍼 매거진 에디터에서 온라인 매거진 에디터로의 변화는 사실 대단한 위험을 감수할 일도, 먼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직업의 수명을 '조금' 연장할 수 있는 정도.


마음이 떴을 때 기회는 찾아오는 걸까. 마침 회사에서도 뉴 미디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위기를 통감했고, 새로운팀을 만들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나의 불안함과 회사의 불안함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나니...


"새로운 팀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네! 하겠습니다."

"...?"


부서 이동을 권유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승락했다. 뭐가 되든 해보자는 심정이었고, 패기 넘치는 젊은 본부장은 뭐라도 하나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능성과 희망의 에너지에 취해 이전 팀 편집장님의 원망을 뒤로하고 새로운 부서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신설 부서는 약 1년 만에 공중분해되었다. 전략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스템 도입, 신규 사업 제안 및 수주, 신규 매체 인큐베이션 등 이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들을 경험했다. 처음 사업 기획서니 제안서라는 것을 써봤고, 유튜브를 기반으로 한 동영상 매체 론칭을 위해 영상 촬영, 편집 기술까지 배웠다. 말 그대로 입술이 터지도록 일했다. 전부 새로 배우는 것 투성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열심히 달렸건만, 종이 매체 위기 극복을 위한 핵심 과제였던 'V로그 미디어'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가동해보기도 전에 무산됐다. 아직 V로그라는 포맷이 유행하기 전이었고, 분명 승산이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조직 자체가 사라졌다. 당시에는 허탈했다. 함께 했던 동료들은 회사에 큰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회사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내놓은 결과물이 별로였다. 별로인 데다 시장성도 없었다. 그러니 회사 입장에서는 투자했던 리소스를 모두 거두고, 그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 것 뿐이었다.


그렇게 '당장은' 안정적인 에디터 일자리를 두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며 의기투합했던 우리는 다시 사내 다른 편집부로 뿔뿔이 흩어졌다. 몇 명은 다시 받아줄 팀이 없어 퇴사를 권고 받기도 했다. 대부분 재배치를 받고 한 두달 안에 퇴사했다. 아무도 실패에 대해 직접대고 조롱하지 않았지만, 들리지 않는 조롱과 허탈감에 다들 힘들어했다. 용기내 내딛은 걸음과 힘겨운 노력의 끝이 다시 제자리라니. 나름 멘탈이 강한(둔한) 나도 좀처럼 새로운 편집부의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종이 매체의 완전한 붕괴가 당장 3년, 5년 안에 올 것 같은 불안함은 여전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우울할 일도 아니었다. 다시 이직 준비를 시작하며 깨달았다. 지난 1년이 얼마나 내 선택의 폭을 넓혀놨는지. 똑같이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하고 구인 구직 사이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1년 전보다 어플라이 할 수 있는 자리가 훨씬 늘어났다.


에디터의 일 = 취재를 하고 섭외를 하고 촬영을 진행하고 기사를 써서 지면 위에 얹는 것.  


그게 이전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이제 영상 촬영을 하고 편집 프로그램을 다루고 프로젝트 기획안과 제안서를 쓸 수 있었다.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무기가 늘어난 것이다. 이제 막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보려는 조직에서는 영상 콘텐츠 에디터를 뽑고 있었고, 뭘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디지털 콘텐츠 팀을 꾸리느라 사람을 구하는 곳도 꽤 있었다.


사실 그런 구인 공고는 이전에도 많았다. 온라인 매거진이 등장한지 적어도 15년이 넘은 시점. 그마저도 모바일로 넘어오면서 더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져나오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그제서야, 내가 '그런 일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변화에 느리다. 스무살 이후 쭉 게으른 삶을 살았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도 크게 안 했고,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순간순간 마음 가는 곳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열심히 살았다고 했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에 비하면 아주 게으른 삶이었던 거다.


변화가 싫어도 변화는 온다. 운이 좋으면 내가 원래 하던 일이 더 큰 가치를 발휘하는 흐름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반대다. 시대가 변한다고 성실, 근면의 가치가 변하진 않을 거다. 그러나 '성실하고 근면하게 하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글쎄. 적자생존이 생태계의 변화에 따른 위험을 감지하고 그에 맞춰 변화, 적응하는 것이라면, 산업혁명 이후의 적자생존이란 산업의 변화에 맞게 내 스킬을 갈고 닦는 것이 아닐까.


대단한 도전도 아니었고 큰 성과도 없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내 삶에 꽤 큰 영향을 미쳤다.


1.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변화가 나의 커리어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깨달음

2.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일은 변할 수 있다는 깨달음

3. 그 변화에 촉을 세우고 어느 정도 발을 맞춰야 한다는 내 관점의 변화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이 생각을 의외로 해본 적 없는 이들이 많다. 나처럼.

누군가는 아직도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에 변화에 눈을 돌리지 않을 거다. 나처럼.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 무기를 갈고 닦는 건 생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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