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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아영 May 05. 2020

Beyond numbers, 숫자 너머의 존엄

코로나19,  '존엄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할 즈음, 나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 일상에 대해 생각했고 여전한 일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감기에 걸린 듯 열이 있기 시작하고 결국 코로나 검사를 받게 되자 두려워졌다. 혹시 양성이면 어떡하지?


콧구멍 속으로 들어온 기다란 면봉 같은 검사 도구는 멈추어야 할 것 같은 지점을 지나 더 깊이 들어왔다. 면봉의 끝이 뇌에 닿을 것만 같았다. 검사 이후 음성 판정을 받기까지의 하룻밤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음성 판정 문자를 받은 아침, 걱정했던 가족과 동료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 아니래!" 그렇다.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현황판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2020년 4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포털사이트를 열어 코로나19 관련 현황을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확진 환자', '완치', '치료 중', '사망' 순서로 표시된 인원을 확인하고 집단감염이 있었는지 살펴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대구의 확진자 숫자가 처음으로 '0'을 기록했던 4월 10일을 기점으로 코로나19 관련 현황판 숫자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확진 환자와 사망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은 일단 지금, 여기의 불안을 아주 조금은 안도감으로 전환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안도감으로 달려가려는 나의 마음을 붙드는 이야기가 있다. 3월 18일 대구에서 사망한 17세 청소년의 이야기. 3월 10일, 공적 마스크를 사기 위해 비 내리는 오후 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린 이후부터 열이 났다고 했다. 건강했던 아들이자 동생이었던 그이는 고열에 시달리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코로나19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3번의 검사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던 그이는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프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이의 사망 이후, 언론은 그의 죽음이 코로나19 때문인지, 코로나19라면 기저 질환 없는 환자도 사망할 수 있는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개학을 더 늦춰야 한다는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그의 죽음은 '검체 수', '검사 수', '양성', '음성'이라는 단어들의 나열로 치환되었다. 17세 청소년의 죽음,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동생이었던 그이의 죽음은 코로나19 감염이 기저 질환이 없는 이에게도 치명적인지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또 다른 데이터로 다루어졌다. 이 사회는 그이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고 있는가.




감염으로 사망한 이들은 의료인이 밀봉하여 입관한다는 정부의 장례 지침을 보았다. 화장장이 공식 업무를 종료한 시간 이후부터 감염으로 사망한 이들의 시신을 화장한다는 소식도 보았다. 이들의 빈소를 차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집단감염의 우려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했다.


사랑하는 이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을 때,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이는 소중한 사람들과 충분한 작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코로나로 인해 죽음을 맞고 있다면, 그때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사의 기로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이의 손조차 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과 무력감. 감염을 무릅쓰고라도 나누고 싶은 마지막 인사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


백신이 없는 바이러스를 맞이한 인류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다. 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이들의 수고로움이 애처로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질문들은 선뜻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코로나19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마지막까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모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감염의 가능성, 그 위협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격리되어 마지막 체온을 느낄 수도 없는 이 현실은 정당한가. '확진 환자도 22명이고 사망자도 4명뿐이라니, 이제 정말 안정기로 접어드나 보다'로 이어지는 이 생각의 흐름은 과연 정당한가.


한국 사회가 다른 어떤 사회보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과 대응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자부심이 담긴 소식들을 접한다. 지금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으며, 그런 사회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 온 동료 시민들과 수고하는 담당자들에게 깊이 고마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이야기들은 없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미국보다 더 잘 대응하는 것이, 일본보다 더 잘 대응하는 것이, 미국에서 또 일본에서 고통 속에 죽어 가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 그 존엄함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6년 전,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이 사회는 세월호 참사 전과 후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고 말했다. 6주기를 맞는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숫자 너머의 사람을 보기 위해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에게 존엄한 삶과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그 사회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후 위기와 핵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이상적인 질문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그런 순간을 마주하실 분들이 계실까 싶어 보르헤스의 문장을 하나 남긴다.



그 어떤 것도 돌 위에 지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어진다.
하지만 마치 모래가 바위인 것처럼 생각하고 지어야 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 글은 뉴스앤조이와 함께하고 있는 연재 "모두를 위한 평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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