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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DI Aug 06. 2016

|Review| 치정과 음악

Movie | Kill Your Darlings (2013 film)

Kill Your Darlings (2013 film)

Directed by John Krokidas / Music by Nico Muhly




Kill Your Darlings / Poster






Kill Your Darlings / Poster











Beatific


Kill Your Darlings / Movie Still Cut

영화 'Kill Your Darlings'은 미국 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비트 문화 운동 - 비트 세대 (Beat Generation) 란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구조에 저항한 특정한 문학가와 예술가의 그룹을 의미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관습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를 거부하고 고도의 감각을 통한 개인적 해방 및 자유를 추구하는 비트 문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비트 시인들의 시는 대개 혼란스럽고 외설스러운 표현 투성이었지만, 앨런 긴즈버그를 비롯해 소설가 잭 케루악 같은 비트 운동의 주요인물들은 즉각적인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아무런 구상이나 수정없이 적어내려가는 일종의 자유롭고 비구성적인 창작을 지지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국학자료원) - 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운동은 인류의 광기 및 전쟁으로 인해, 논리와 이성이 무너진 당시대에 경종을 울린다. 



kill Your Darlings / Poster (Character)

일부 비트족이 고도의 정신적 수양과 개인의 해방을 외치며 마약이나 섹스에 탐닉하는 등 지하문화를 창출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비트 운동의 본질은 단 한 순간의 '찰나'일지라도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데에 있었고, 정신적 방황을 자처해서라도 부패한 사회와 기존 체제의 위선적인 관습을 탈피하고자 발버둥쳤다. 시대의 잘못된 억압이나 체제를 위한 환상에 대해 대부분의 다수는 순응과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이렇게 발버둥치며 풍자하고 저항한 비트 세대와 같은 용감한 소수가 있었기에, '나' 같은 사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금'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비트족의 '비트'는 원래 '기진맥진한'이라는 뜻인데, 후에는 '행복에 넘친'(beatific)이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들이 비록 절망과 아픔에 가득찼을지라도, 진실을 갈망하는 과정 속에서 분명 행복에도 넘쳤으리라 생각한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치정(癡情), 인간의 본능에 대하여

  

Kill Your Darlings / Poster (Art)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 된, 이 영화는 실제 인물 '루시엔 카'를 긴즈버그와 같은 비트 시인들의 뮤즈로 등장시킨다. 연관 검색어로 퇴폐미가 뜨는 데인 드한이 연기한 영화 속의 '루시엔 카'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인다. 평소 데인 드한의 위험한 분위기에 호감보다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는 나로서도, 영화 속 '루시엔 카'의 매력이 치명적이라는 데에는 반기를 들 수 없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루시엔 카'를 만나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호감(명암의 차이는 있을지라도)'을 느낄것이다. 해리포터로 유명한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연기한 '앨런 긴즈버그' 역시, '루시엔 카'에게 강렬한 '호감'의 첫인상을 경험한다. 즉흥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한 '루시엔 카'의 행동은 주변의 인물을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하게 만든다. '앨런 긴즈버그'를 비롯한 그 주변인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강렬한 에너지를 끌어내는 '루시엔 카'에게 점점 빠져든다. 갈수록 그의 관심과 애정에 목말라하는 '앨런 긴즈버그'는, 많은 이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줄이라도 타는 듯 불안해 보이는 '루시엔 카'를 더욱 사랑한다.  



Kill Your Darlings / Poster (Teaser)

모든 존재(存在) - 존재란 철학적으로는 실재보다 추상적이고 넓은 개념 (출처:국립국어원)- 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생물이란, 종류를 막론하고 생존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 있다. 수많은 본능 및 감각 중에 나는 '호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사랑, 애정, 끌림 등 유사한 의미의 많은 단어 중, 정확히 '호감'에 대한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종종 머릿 속에 그려지는 어떤 것에 대해 단어를 찾을 때면, 솔직히 어떤 단어가 적합한지 확신이 없고 혼돈되어 항상 고민한다. 그래도 영화 'Killngs Your Darlings'에서 주요 인물들의 관계가 '호감'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 '호감'에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글'을 매개체로 절정을 치닫게 되고, '사랑'을 비롯한 온갖 어지러운 감정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농도 짙은 치정극으로 연출된다.





Kill Your Darlings / Movie Still Cut

한데 '치정'의 의미를 살펴보니 어딘가 이상하다. 치정(癡情)의 어원을 보면 '癡(어리석을 치)'는 어리석거나 미련하고 미친 듯한 짓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情(뜻 정)'은 느낀 생각이나 사랑의 마음 또는 욕심에 연결되는 감정 등의 의미를 가진다. (출처 : 네이버 한자사전) 하지만 현재 '치정'의 사전적 의미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출처 : 국립국어원) 으로 나타나 있다. 사실 그 어원에서 남녀(성별)에 관한 어떠한 언급이나 해석은 찾을 수가 없는데, 왜 뜬금없이 '남녀 간의 사랑'이 등장하는가. 적어도 어원에 따르면 '치정'의 의미를 '사람의 어리석고 미련한 감정이나 마음 또는 사랑'이라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신이 느낀 생각이나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남녀 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어 설명되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그래, 가끔 내가 하는 이상하고 미련한 짓에 스스로 놀라는 '나'도 인간중의 하나로서, 성별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치정'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단어 뜻 고치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 유독 '퀴어'에 분개하는가


Kill Your Darlings / Movie Still Cut

이 영화를 퀴어 - 퀴어(Queer)란 본래는 "이상한", "색다른" 등을 나타내는 단어로 영어권에서 위조술과 남성 동성애를 의미했으며 19~20세기에 걸쳐 주로 성소수자인 동성애자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wikipedia) -  영화로 소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본능적인 '호감'에서 비롯된 그저 보통 인간의 '치정'을 다룬 영화라고 소개하련다. 실재하는 존재로서, 아니 적어도 사람으로서 '호감'이나 '애정'을 느끼고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아닐까. 굳이 '생존'을 위함이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사랑'을 느끼고, 그로 인해 어리석은 짓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인간사에서 흔한 일이지 않은가.


사실 '퀴어'라는 단어는 한국어 사전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유사한 의미로 '성소수자'가 있지만 아직은 이 역시 국립국어원이 인정한 단어는 아니다. 한국어 사전에 이와 관련한 단어는 '동성애(또는 남색)'가 유일하다. '동성애'는 '동성 간의 혹은 동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출처 : 국립국어원)로, 그 어원에서 '愛(사랑 애)'는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소중히 하는 마음이나 좋아하는 마음의 뜻이 합한 것을 의미하며, '동성(same sex)'은 '이성(the opposite sex)'과 같이 그저 '성별(Gender)'로서의 '성(Sex)'을 의미한다. '동성애'란 단어가 성적(Sexual)인 육체적 행위나 취향을 내포한 의미가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흔히 '동성애'를 언급할 때, 성적(Sexual)인 개념을 당연하게 연관짓지 않는가. 대부분 성적 행위(Sexual Activity) 그 자체를 떠올릴 것이다. 솔직히 나도 '동성애'라는 단어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성적(Sexual)인 개념을 제외한다면, '불편'을 느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불편'은 주체의 소유이지 않을까. '불편'을 느낀다는 것은, '동성애'라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인 '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Kill Your Darlings / Movie Still Cut

'불편'의 문제를 '동성애'란 객체에게 부여하는 의견을 찾아보면, '순리'나 '자연'이라는 단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한데 과연 인간이 '순리'나 '자연'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는가. 백 보 양보하여, 다수의 인간이 합의 하여 개념을 정했다고 쳐보자. 그래도 '순리'나 '자연'에 반하는 것은 수 없이 많은데, 유독 '동성애'에만 분개하는가. 솔직해보자. 케케 묵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나도 '편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영화 속의 '루시엔 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인물들의 관계가 여타 동성애의 관점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에게 관계는 그냥 관계이고,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별(Gender)'에 제한되지 않는 것처럼, '성적(Sexual)'으로도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Gender(성별)'이든 'Sexual(성적)'이든 그저 '성(Sex)' 의 일환일 뿐이다. '사랑'의 종을 규정하고,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어떤 이유로 가능하단 말인가. 분개할 것은 성(Sex)의 '퀴어'가 아니라 사랑(Love)의 '차별''불평'이다.



 













NICO MUHLY, 본능으로서의 음악


서두에서 밝힌것처럼 존재라면 본능이 있다고 여기는 나는, '음악'도 그 일환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의 음악이 아주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라 느꼈다. 만약 영화 'Kill Your Darilngs'의 음악을 영화와 상관없이 음악만 떼어 놓고 들었다면, 사실 큰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략 미니멀리즘 - 내게 미니멀리즘 음악은 Philip Glass의 몇 곡 외에는 다 비슷하게 들린다. 지극히 주관적 취향의 문제. - 의 음악으로 인식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영화를 통해 만난 이 음악은 나를 감상에 푹 젖게 했다. 특히 어느 순간부터 음악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영화 속의 모든 장면(그리고 공기와 흐름)에 모든 음악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마치 청각의 시각화시각의 청각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까.


Source : http://nicomuhly.com

이렇게 개인적으로 영화 'Kill Your Darilngs'에 대한 만족감을 최대로 끌어올려 준 음악 감독은 Nico Muhly로, 알고 보니 OST를 찾고 싶었던 영화 'Joshua'의 음악 감독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21세기 현대 클래식 음악의 거장이라 불리는 Nico Muhly, 그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그에 대해 검색하며 그가 필립 글래스에게 작곡을 사사받은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음악이 확실히 나의 취향이리라 확신했다. 개인적으로 미니멀리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필립 글래스의 몇 곡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Kill Your Darlings'의 음악은 Nico Muhly의 다른 음악들에 비하면 덜 난해한 편이다.  만약 미니멀리즘한 음악을 기대한다면, 그의 앨범 중 이 영화의 OST를 추천하고 싶다.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깊이 감상한 후 Nico muhly의 음악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볼 요량으로 글을 여기서 마감한다.  





















※ Attach

음악, 문학, 음식 등 모든것에 대한 나의 취향 및 견해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잡식성이다. 어떤 분야나 장르를 선호한다기보다, 그냥 나의 취향의 '그 것'을 선호한다. 타인이 보기에 아마 일관성이 없어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나이기에 나의 취향이 지극히 일관적이다. 예를 들어 추리 소설 중에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작품에는 열광하지만,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작품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또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Johann Sebastian Bach. Six Suites for Solo Cello)을 안너 빌스마(Anner Bylsma)의 연주로 들으며 전율을 느끼지만, 요요마(Yo-Yo Ma)의 연주로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취향'으로, 간혹 설명의 편의상 비교를 위해 '주관적 취향 외의 것'에 대하여 남기는 나의 의견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폄하하거나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 매거진의 이름처럼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서, 개인적인 기록으로 '브런치'를 시작했음을 한번은 밝히고 넘어가야 겠다. 나의 견해에 대하여 혹시나 누군가 불편함을 느낄수도 있음에 양해를 구하고자, 나의 주관적 '취향'의 지조를 유지하고자 특유의 노파심으로 스스로 이 글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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