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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DI Jul 22. 2016

|Review| What is right..?

Movie | The Tall Man (2012 film)

The Tall Man (2012 film)

directed by Pascal Laugier


The tall man / Poster




The Tall Man 中


" Julia... But i would still die for him. you know? "

    " Hmm.. It's just the same everywhere. the defeat, and the pain.. It's a cycle.. "

" What cycle ? "

    " The system is broken. It doesn't work. It's not matter of being a good person or being a bad person, It's about how you cope. We have to break the cycle it has to be a priority but it's not. What did I change? Nothing ! The children continued to suffer. But no one doesn't anything about it. The world is not change. "

" Where are they ? "

    " Everywhere.... "









서슬 퍼런 이야기


극 중 줄리아는 빈민가의 아이들을 부유하고 좋은 환경의 부모에게 양도한다. 조금 더 감정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빈민가의 빈민한 부모들에게서 양적(어쩌면 질적으로도) 학대를 당하는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서 부유층의 부유한 부모들에게 불법 입양시킨다. 초반 줄리아는 외동아들을 키우며 주변 어려운 이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미망인(미망인의 사전적 의미는 다소 부정적이지만, 남녀 불문 배우자를 잃은 '사람'으로 다루어지는게 최근의 관점)으로 보여지지만, 후반 줄리아는 오직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다른 이의 아이를 훔쳐 천륜을 끊는 범죄자로 보여진다. 그것도 죽은 것으로 알려진 남편과 함께 아주 조직적이고 폐쇄적으로...


실종된 아이들에 대한 범행을 인정한 후에 죄수복을 입고 처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줄리아에게, 아들을 잃은 한 엄마가 찾아온다. 그리고 줄리아에게 자신의 아이를 위해 자신은 죽음도 불사할 수 있다며, 줄리아에게 그것을 아느냐고 묻는다. 자신의 아이를 유괴한 범인으로 의심되는 용의자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가 하는 말 치고는 이상하지 은가. 마치 줄리아가 한 그 무엇이, 아마도 자신의 아이를 위한 무엇이였다고 짐작한듯이..  비록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고달프게 살지만 열심히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나는 그런 엄마라고..  그녀는 줄리아에게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한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줄리아로부터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해 대답을 듣고자 했더라도, 굳이 그녀가 줄리아에게 자신의 양육환경 및 방법에 대해 변명 또는 설명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제 3자가 무슨 상관이냐며 아이의 행방을 말하지 않으면 당신과 같이 죽겠다고 달려들어도, 누구도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지 않는가.


The tall man / Capture the movie

아마도 이 영화는 많은 부모들로부터 분개와 지탄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천륜(天倫)'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더라도, 아마 극중 톨맨이 천벌 받아 마땅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자식에게는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부모의 진실된 마음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환경이나 조건이라도 아이에게 무엇이 최고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 않냐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도 그게 맞는 말이라고 할 것 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보다, 줄리아가 한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줄리아는 본인이 하는 이야기가 단순히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존재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Cope'할지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줄리아가 아프고 잔인하게 던진 이 이야기는 무척이나 예리하고, 듣기만해도 베일듯 서슬이 퍼렇다. 줄리아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일랑은 요한복음 8장 7절에 제쳐놓고, 일단 나는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 줄리아가 한 이야기에 새끼 손가락이라도 베여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HOW YOU COPE


The tall man / Movie still cut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질문하고 싶다.  " How do you Cope? " 나는 그리고 당신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 문장에서 'Cope'는 주로 어떤 재난이나 상황을 '대처한다'거나 어떤 문제나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각종 사전과 예문 등을 보고 자의적으로 해석함) 그 어원을 찾아보니 Cope와 Coup는 '싸우다, 다투다'라는 의미로 전달되었으며, 한편 'Cope'는 덮개, 망토, 덮어씌우다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는 총보다 칼을 사용하던 시대에 덮개와 같은 '소매 없는 외투'가 싸움이나 전투에 더욱 용이함에서 유래되어, Cope와 Coup에서 변형된 'Cape'가 지금의 망토나 소매없는 외투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원과 관련하여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하고 주워 모은것으로, 결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양해 드림) -개인적으로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언급된 '언어'는 어떠한 것이라도 중요하게 눈 여겨 보며 깊이 탐색하고 오래 고민하는 편으로, 혹자는 과대(확대)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모든 예술의 본질은 개인의 해석에 있다는 것이 나의 주관적인 입장이다.- 이처럼 'Cope'의 의미를 배경에 두고, 줄리아가 절망을 토하듯이 뱉어낸 이야기를 지극히 자의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 It's not matter of being a good person or being a bad person, It's about how you cope. "


줄리아의 이 대사를 'Cope'의 어원을 가지고 내 생각대로 의역할 수 있다면, 나는 "단순히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가 중요할까요?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과,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가 아닐까요 ?"라고 할 것 이다. 여기서 인간의 '삶'을 일종의 '전쟁'에 빗대어 본다면, 줄리아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전쟁에 대한 인간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창과 방패도 구경 못한 새내기 군인을 양성해야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더욱 각성해야 한다고 질타하고 있다. 전쟁을 원했든 원치 않았든, 위치에 대한 선택권이 있었든 없었든, 새내기 양성은 또 무엇인지, 인간에게 그런 본질적인 문제에 답이 있을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아이를 잃은 이 엄마는 마치 녹록지 않은 전장에서 최고 최전방 초소에 위치한 군인같은 사람이다. 그녀에게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혹할지, 그 절망감만으로도 숨이 넘어가는 사람에게 줄리아는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는 중요치 않다고...  " It's about how you cope. "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라고... 잔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줄리아는 줄리아 '쟁'에서 싸움에 적합한 외투를 준비했는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뭣이 중헌디'


The tall man / Movie still cut

마치 새내기 군인과 같은 어린 시절의 '인간'은 아직 인격적인 사고체계가 불명확하다. 이렇게 아직 어린 '인간'의 사고체계는 주변의 어린 시절을 지난 '인간'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성인 또는 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그 외에도 그러한 '인간'의 모든 것은 어린 '인간'에게 마치 전쟁 지침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주변의 어린 시절을 지난 '인간'은 그 어떤 전쟁도 타인이 대신 싸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이다. 줄리아가 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로 영화 '곡성'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뭣이 중헌지 똑바로 알라'는 것이다.(이 대사는 참 어디다 갖다 붙여도, 중심을 관통하는 것 같다.) 지금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보고, 정신차리고 살라는 것이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좋은 게 좋은 것 이라고 마냥 흐르지 말라는 것이다.


The tall man / Movie still cut

타깝게도 나는 세상 혹은 인간의 삶을 아름답다거나 무지개가 떠오르는 희망의 동산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에게 그런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신물이 난다. 실제로 나는 어릴 적 정말로 그와 비슷하게 들었고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들은대로 믿었던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막상 마주한 나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듣고 믿은 것과는 전혀 다르게 잔인하고 가혹했으며, 내게 그렇게 말해왔던 그 어느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하지도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감독 '파스칼 로지에'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인간의 '고통'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감독이 말하기를 '고통'이란 실제적인 것이고, 이 세상은 사실 너무나도 끔찍하고(감독은 더 격한 표현으로 말함) 인간으로서는 삶이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많은 부분 공감이 간다. 이런 시각에 대해 '비관주의자'라는 평을 피할 수 없겠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않은가.


영화의 주된 배경은 황폐화된 광산 주변의 낙후된 마을이다. 마을의 회색빛 풍경 위에 어제나 오늘이나 낮이고 밤이고 구분없이 술을 마시고 있거나, 하릴없이 집 앞에 마냥 앉아있는  대부분의 성인들 사이로, 깨진 병조각이나 찢어진 종이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삼삼오오 모여 해맑은 얼굴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연출된다. 그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지금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로, 오히려 언젠가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거라고 꿈꿀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의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어떤 것을 전해받게 될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의, 특히 부모들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솔직히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안일한 부모들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본질적인 해결은 안되겠지만, 이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작금의 현실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플라톤의 비인도적인 유아교육론이라도 실현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부모'로 존재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지금 하는 말들에 어폐가 있을 수 있고, 있을 것이다. 훗날 내가 부모가 되어 지금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쥐구멍이라도 찾을지 모른다. 


' How do I cope? '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모'라면 자식에 있어서 반드시 끝없이 자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걸까 ?


The tall man / Movie still cut

제시카 비엘(그녀의 얼굴 선이 참 좋다.)이 실감나게 연기한 줄리아. 자신의 몸을 혹사해가면서까지 줄리아가 그렇게도 애타게 찾아 헤매던 아이가, 사실은 다른 이의 실종된 아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줄리아의 신분은 피해자에서 가해자 바뀌었다. 게다가 피해자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이에게 '피해'를 남긴 가해자인데, 줄리아의 모습은 마치 '피해자'처럼 보인다. (헉... '예뻐서인가?'라는 엉뚱한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심미안으로 인한 편견은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다루기로 하고..)


" What did i change? NOTHING ! "


(예쁜...) 줄리아는 자신이 한 일로 인한 그 어떤 변화도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를 달래듯이 눈물로 호소하는데, 가해자는 처연한 모습으로 그저 슬픔만 꾹꾹 눌러 삼키는 모양새가 어째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뀐것처럼 보인다. 줄리아는 무고한 아이들은 계속해서 고통받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으며,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아닌, 잘못을 인정 하는 것도 아닌, 참 뚱딴지 같은 말을 한다. 가해자가 고작 입을 열어 한다는 소리가, 피해자로서는 맞은 데 또 맞는 격이다. 가슴에 '비밀'을 묻고 순순히 잡힌 줄리아는 철창안에서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저 눈물을 조금 흘릴 뿐이다.


'My first mother loved me and I loved my first mother. My second mother only mothered me for a short time. I often think about her. Whether she was good person or not, I'm still not sure. But my second mother loved me and I loved my second mother. my third mother is teaching me about the bigger world. I listen to what she says, I want to please her. My third mother loves me, and I love my third mother.  ... My world has changed. I'm not like the other. I guess they're forgotten. I can't. Every morning I wake up to the thought of giving it all up and running back home. But I remind myself I wanted this life. I wanted it. I made it happen. I guess it's better this way right? Right..? Right..? 
The tall man / Capture the movie

제나는 마을의 아이들 중 나이가 많은 편이였다. 제나는 줄리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심지어 줄리아가 자신에게도 그 일을 행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끝내 제나의 바람대로 그 일이 일어났다. 일명 '납치'를 당한 다른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까맣게 잊고, 새로운 부모의 새로운 자식으로 살아갈것이다. 하지만 제나는 그들과 다르다. 제나는 아직 어린시절을 지나는 중인 '인간'이지만, 자신의 사고로 자신의 삶을 계량하고,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제나 자신이 원하고 만들어낸 이 선택이, 더 옳은 선택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제나의 전쟁에 적합한 외투를 구비하고,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제나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나는 제대로 'COPE'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줄리아에 대한 제나의 의견에 동의한다. 제나로서는 자신의 선택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일텐데도, 줄리아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전장의 최전방에 위치한 많은 '아이'들을 후방의 위치에 다시 배정시킨 줄리아, 줄리아는 옳은가 그른가. 개인적으로는 줄리아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줄리아 본인도 본인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인간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줄리아를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박하고 싶다. 옳지도 않지만, 그르지도 않다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렵다. 그나마 셀 수 있는 시간과 달리, 생각은 단위도 없지 않은가. 유아동에 관심 많고, 교육과 관련한 전공을 했고, 평소 부모교육의 필요성을 외쳐오던(..주로 혼자서) 나이기에....  이 영화는 원체 산만한 내 머리속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은데다가 정리가 안돼서, 내가 지금 리뷰를 어떻게 쓴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리뷰는 틈만 나면 읽고, 계속 수정하게 될 것 같다. 다소 격앙된 감정에 일부 지나친 부분이 있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리며...  처음 살아보는 인생에, 처음 해보는 부모에, 매 순간이 항상 처음인 인간은 참 고달픈 존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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