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직장인의 자부심
고등학생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대부분 한 번쯤은 고개를 갸웃한다. "고등학생이 일을 해요?"라는 반응도 이제는 익숙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게 뭔가 특별하거나 드문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뭐 그렇다고 그렇게 놀랄 일인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성적은 상위 10% 안에 늘 들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학업에 흥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공부를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기묘한 경쟁심은 늘 그런데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을 고려했을 때 '공부만 하면 된다'는 말이 나에겐 현실과 동떨어진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나 자사고를 가려면 드는 사교육 비용, 그리고 그 이후의 대학 진학까지 생각하면 감당해야 할 생활비 부담을 떠안고도 잘 해낼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물론 장학금을 받거나 스스로 돈을 버는 방법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막연한 기대보다는 눈앞에 놓인 현실이 훨씬 더 크고 명확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특성화고를 선택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학생'이면서도 동시에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 대학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거나, 조금 뒤 대학에 입학해서 새터를 신나게 만끽하며 캠퍼스 라이프를 시작할 때, 나는 회사에서 업무 매뉴얼을 외우고, 비즈니스 이메일을 작성하고, 각종 문서를 정리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3월 퇴근길에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의 즐거운 일상과 내 현실 사이의 간극이 유독 크게 느껴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경험이 나를 꽤 빠르게 시스템이나 툴을 익히는 데 익숙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새로운 플랫폼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업무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내 역할을 찾아가는 능력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아무튼 전공이 개발이라 개발자 현업인 친구들도 많고. 남들보다 빨리 시작한 만큼,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만큼 습득력과 적응력 하나만큼은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런 유연성과 빠른 학습 능력은 어려서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서던 나이였고, 실패를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런 자신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당시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동료나 동기가 전혀 없었던 터라, 나만 유난스럽게 겉도는 것 같다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나보다 최소 열 살은 많았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울리려고 했던 게 더 웃기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저찌 겉으로 보이는 업무 성과는 평균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지 못하거나, 이미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다시 설명하고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주어지는 책임의 강도를 더 높여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다. 쉽게 말하면, 잡일만 하기 싫었다는 소리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는 일도 많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며, 주말에도 자발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그래서 야근이란 것도 별 것 아니라는 강단을 얻게 되기도 했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이 상당히 높아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과도한 노력이 꼭 필요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얻은 끈기와 인내심은 분명히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이건 곧 끈기있게 뭔가를 끝내는 힘으로 결부되니까.
처음에 내가 갔던 회사는, 말 그대로 열악한 중소기업이었다. 직무 분장이 애매했고, 체계적인 인수인계 과정도 없었다. 부서라기보다는 그냥 각자 맡은 일이 있는 사람들이 한 명씩 있는 구조였고, 누가 정확히 무슨 일을 담당하는지 제대로 정리된 문서도 없었다. 그래서 일을 제대로 배우려면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환경 덕분에 일을 정말 빠르게, 그리고 폭넓게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단순한 실무 업무는 물론이고, 제안이나 간단한 웹 개발까지 손댔던 이유도 그때의 환경 때문이었다. 누군가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씩 익혀나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많이 했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지금도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먼저 드는 성격이 만들어진 것 같다.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을 배워야 할 때도 '할 수 있을까?'보다는 '어떻게 하면 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습관이 그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개척자는 아니었지만, 주어진 환경 안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잘 해내고 싶었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고,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늘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 정도의 의지와 나 자신에 대한 신뢰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증명해주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스스로를 믿고 보여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도 신기하거나 때로는 안쓰럽게 여겼을 수도 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지냈지만, 속으로는 '저 애가 과연 괜찮을까?',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정말 노골적으로 나이를 이유로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업무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선입견을 드러내거나, 나를 동등한 동료가 아닌 '어린 애'로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는 정말 속상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랬던 건 아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도와줬고, 진심으로 응원해줬으며, 때로는 나보다도 내 가능성을 더 믿어주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도 지금까지 꽤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이 어린 후배에게 업무를 꼼꼼히 가르쳐주시던 선배님들, 실수해도 다독여주시던 상사분들, 나이랑은 별개니 해내보라고 어려운 것들을 맡겨주던 팀장님까지.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그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특성화고에 강사로 초빙되어서 두번정도 강의를 했는데.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첫발을 내딛으려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들 나를 이런 기분으로 봤을까? 복잡하고 어려운데 계속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였다. 아마 과거의 나를 보았으리라. 뭔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과연 괜찮을까?', '너무 이른 게 아닐까?'라는 걱정 섞인 말부터 듣게 되는 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위축되게 하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 친구들에게는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외로우며, 아무리 잘못된 선택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후회하지 않을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을 진짜 좋은 길로, 가치 있는 길로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뿐이라는 것도 말이다.
지금도 누군가와 처음 만나서 고등학생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말하면, 여전히 '그럼 학벌은 어떻게 되세요?', '대학은 안 나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듣곤 한다. 나이를 정확히 모를 때는 아무 문제없이 자연스럽던 대화 분위기가, 내 나이와 경력을 알고 나면 묘하게 달라지는 것도 여전히 느낀다. 어떤 때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어떤 때는 안타까움이나 우려가 섞인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길을 선택했을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어떤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보다도 내가 선택한 길이 좋은 길이었다는 결과는 결국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렇게 만들어왔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제법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제는 후배들에게 업무를 가르쳐주거나 누군가에게 전문적인 도움과 조언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기도 한다. 그 모든 시간과 경험이 다 자랑스럽다. 사실 가끔 온전히 나이 때문에 뭔가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면, 간혹 과거의 선택을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했었다. '그때 다른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과정이었다는 걸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대학에 진학해서 학업도 이어가고 있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그 준비로 정신이 없기도 하다. 웃기게도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도 직장에서의 정체성은 이미 8년차 직장인이라는 게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일을 먼저 시작했고, 지금은 다시 부족했던 학업 부분을 차근차근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남들과는 순서가 조금 다르지만, 돌아보면 참 다르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든 경험이 나를 더 단단하고 성숙하게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분명히 엄청 힘들고, 엄청 지치며, 때로는 억울하고 서러울 수도 있는 길이다. 동또래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시간도 포기해야 하고, 나이 때문에 겪는 부당한 상황들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선택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안다. 일이란 건 결국 얼마나 일찍 시작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성장하고 단단해졌는지가 진짜 중요한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