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점프컷에 동의합니다

라이크 크레이지의 편집기법과 우리가 시간을 지각하는 방식

by 딥마고

우리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 바로 시간이다. 인간이 분절해놓고 전 지구가 동의하는 바,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이다. 우리는 시간을 꼭 자산처럼 활용한다. 1000원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를 행사하듯, 5분이라는 시간도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를 행사한다.


아니, 아니다.

위의 문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동의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의 2시간과 아주 지루한 강의를 들을 때의 2시간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3분 남짓한 음악에 귀를 기울여 정성을 다해 음악감상을 할 때 느끼는 시간 감각과, 운전이나 독서 등의 다른 일에 집중하면서 BGM으로 틀어둔 음악이 소비하는 3분이 주는 감각은 전혀 다르다. 이런 예를 들기 시작하면 끝도 없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많은 이가 떠올릴 수 있는 경우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의 '말도 안 되는' 속도감이다.


여기에 사랑과 시간에 관한 영화가 있다.

poster.jpg 사랑과 시간에 관한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여자와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겨우 하루 이틀쯤이나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눈빛 교환 몇 번, 편지 하나, 한 번의 저녁으로 둘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다면 동의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사랑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간을 잡아먹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도 아주 게걸스럽게.


그리하여 우리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할 때, 기억은 몽롱하되 어떤 장면은 더할 수 없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반면 어떤 장면은 아예 기억에서 들어낸 것처럼 사라진다. 기억에서 들어낸 장면들의 결핍으로 인해 연인과 보내는 시간은 꼭 다른 이들이 쓰는 시간에서 반으로, 아니 반의 반으로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6시간은 3시간처럼, 30분처럼, 3분처럼, 3초처럼 느껴진다.


나에게는 <라이크 크레이지>가 이런 시간 감각을 점프컷을 활용해 표현해낸 것처럼 보였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어 말하자면 <라이크 크레이지>는 점프컷을 남발하는 영화다.

같은 앵글에서 촬영한 것을 뚝뚝 끊어내어 중간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보이는 점프컷. 주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낼 때 쓰인다.


점프컷의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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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체류관련규정을 어기고 미국에 남기로 했을 때 그 여름이 어떻게 지났는지를 설명하는 점프컷 시퀀스는 사랑의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소비되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여자가 직장생활 중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 갑자기 남자에게 영국으로 건너오라고 제안한 뒤 영국 집에서 남녀가 재회하는 장면은, 고정된 앵글이 아닌 핸드헬드 촬영 기법의 영상을 점프컷으로 편집해서 몽롱하고 독특한 느낌을 선사한다.


시간은 흐르고 둘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는, 조금씩 컷의 호흡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격렬한 감정을 안정을 되찾고, 현실은 낭만을 방해한다. 사랑의 숨가쁜 시간이 이성적인 세상의 호흡을 다시금 되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엔딩 시퀀스는 그렇게 한 컷을 길게 배치한다. 결혼, 갈등, 외도 등 여러 굴곡을 함께 거치고 다시 서로의 품에 안긴 남녀의 표정은 사색 속에 잠겨 있고, 이번엔 반대로 1초를 1분처럼, 10분처럼, 10시간처럼 음미한다. 그 음미 끝에 둘의 모습은 어떨지 영화는 말하고 있지 않으나, 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예전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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