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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Nov 19. 2020

삶의 복습, 육아

어린 인간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는 것

단기 기억에 비해서 장기 기억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 육아는 때로 큰 축복을 준다. 그 축복이란, 삶을 처음부터 살지 않으면서도 삶을 복습할 수 있는 기회다.


아이에게 매일 밤 읽어주는 책에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흥미로운 지식이 가득하다. 민들레의 생애주기라든가 돌고래의 생식, 목성의 대기 성분 같은. 분명 어디에선가는 한 번 읽었을 테지만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주는 그런 지식들 말이다.



지식뿐 아니다. 바이올린을 10년씩이나 배워두고 악기 하나 관리 못해서 창고 안에서 곰팡이와 바이올린을 동거시키고 있었던 내 2-30대에서 먼지를 툭툭 털어내기 시작했다. 계기는, 아이가 악보를 가져와서 이 노래를 불러달라는데 악보 보는 법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악보 해독은 꼭 나에게 외국어 하나를 더 하는 것과 같은 확장감을 주었었는데. 그 느낌이 얼마나 근사했던 것이었는지, 그 능력을 잃고 나니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아이의 피아노 레슨 시작 시기에 맞추어 내 바이올린 기억 되짚기 개인 레슨을 등록하고 말았다.



이건 꼭 테넷에 등장하듯 과거의 나를 부여잡고 씨름을 하는 모양새 아닐까. 나는 과거를 바꿀 수 없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현재까지의 스토리 역시 바꿀 수 없지만. 스스로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미래의 나에게 돌아오라고, 다시 너 자신을 반복해보라고 소환할 수는 있는 것이다.


과거의 멋졌던 나 이리 와


어린 인간에게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은, 조금 거창하게 말해본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에게 환기시키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 외에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어떤 것들. 언어를 잃어도 여전히 연주 능력은 유지하는 노인처럼, 남들보다 잘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고, 그게 누군가의 밥벌이가 되지 않더라도, 아무런 목적이 없더라도, 그저 인간이기에 하는 활동들. 이미지와 문장을 수집하기. 자전거 산책. 가구 만들기. 손글씨 쓰기. 사진기에 관해 공부하기.


1인분의 몫을 해낼 수 있단 걸 증명하는 데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2-30대를 지나, 타인에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지언정 정신적 풍요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상태로 변모하는 데, 육아는 때로 좋은 계기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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