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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Sep 24. 2020

'나는 성공적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까?'

4년 전의 내가 던진, 완전히 틀린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

지금부터 쓸 이 글은 아래의 글에 대한 대답과도 같은 글이다. 아래의 글은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야심 차게 기획한 연재 시리즈의 첫 글이다.

링크를 누르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링크된 글을 세 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나는 우리 회사에서 최초로 임신한 PD다.

- 나도 20대엔 엄마 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책 없이 놀거나 일했다.

- 내가 과연 성공적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yesasimpson/2


2017년 2월에 태어난 나의 딸은 이제 한국 나이로 네 살이 되었다. 블랙핑크의 노래를 따라 부를 줄 알고, 슬라임 카페에 가서 '파츠'를 고르고 주물럭대면서 만족할 줄 알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른다. 머리뼈가 채 닫히지 않은 그 갓난아이가 이렇게 되기까지, 나는 '성공적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해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그 질문은 잘못되었다.


첫 글을 다시 읽어보면, 당시의 나는 아기가 내 삶의 절취선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설렘과 뒤범벅되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 두려움은 2017년 2월 출산 이후 강박적인 글의 업로드 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 자신의 강한 편견과 싸우면서 휴직기간을 보냈다. 육아는 소모적인 일이며 내 자아를 조금씩 갉아 마침내는 완전히 삼켜버릴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가 변한다면, 결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커다란 불안함이 생산성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매주 화요일마다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또 유튜브에 콘텐츠를 만들어 올렸다. 창업 준비도 해보았다. 독서모임을 시작했고, 절대로 결석하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놀면서 불평만 하는' 여자로 취급당하는 게 무서웠으면서, 그 무서움 때문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려 들었으면서, 아닌 척했다. 전업주부에 대한 괄시적인 시선은 내 마음 한 구석에도, 쉬이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가장 어두운 곳에 꽁꽁 숨어있었다.


내 브런치는 2018년 5월 내가 복직한 이후로 휴지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것이 말해주는 건, 나는 일에서 '내가 생산적인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찾았다는 것이다. 회사가 나에게 위임하는 권한과 직급으로 나는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고, 시간을 저당 잡혀도, 주말이 순식간에 지나가도, 깊은 사유가 내 삶에서 설 자리를 잃어도, 매주 화요일에 글을 쓴다거나 유튜브에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니까 2018년 5월 이후로 1년 동안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하는 그 사이에 이런 글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면서, 나는 스스로 '성공적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그대로 시간을 보내왔던 것 같다.


오늘 오래간만에 아침 7시 반부터 12시간 육아와 가사노동에 집중했다. 육아휴직 때는 거의 매일 이랬었는데도 오늘은 더더욱 역사상의 무수한 가사노동자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하루였다. 육아, 간단한 장보기, 빨래, 설거지만 했는데도 진이 다 빠져서 우리 엄마를 포함한 전업 가사노동자의 하루를 상상해버렸다. 매일매일 오늘 저녁 뭐할까 메뉴 고민해서 장 봐오고 (애도 무거워 죽겠는데 장바구니 최소 7kg) 장 봐온 걸 또 (애 보면서) 요리하고 계절에 따라 뭐 또 소파 천 갈고 커튼 갈고 청소도 요렇게 저렇게 세제 만들어서 해보고 애들 커 가는 거에 따라 학원이나 과외 알아보고 학교 모임 가고 도시락 거리 고민하고 공과금 내고 아침마다 남편 끼니 챙기고 와이셔츠 다려주고 시댁 친정 어르신들 안부 전화하고 용돈 챙기고 가계부 쓰고 재테크하고 어짜고 저짜고 했던 그 인생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그래도 적성에 맞았던 것 같다. 이 모든 고단한 과정을 한 단어로 퉁친 '살림'을 참 잘했다. 최근에서야 깨닫는 것은 모든 여성이 살림에 소질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강요해도, 재능이 없는 사람은 못한다. 나 같은 사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사랑을 표현하고 티 내는 걸 잘한다는 거다. 티를 내는 과정에서 살림과 교집합에 속하는 활동이 가끔 빛난다. 아기에게는 사랑이 '살리는 일(살림)'이라서. 이립이는 크면 아마 디테일하게 주위 사람을 살뜰히 챙기고 아이디어를 내어 '집안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덕목은 아빠의 전유물로 기억할 것이다. (2018년 9월 26일)


집안일의 대부분을 남편과 외부 업체가 하도록 맡기면서 이것이 내가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런 방식이 내 삶에 어느 정도의 균형을 가져다준 것도 맞다. 그렇지만 복직 1년 후인 2019년 5월, 겨우 짜내듯이 업로드된 글은 사실상 그놈의 '육아와 일 병행'의 실패를 증명하고 있다. 그 글에서 실패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거나 세심하게 분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조차, 부끄러울 만큼 뼈아프게도 실패적이다.


https://brunch.co.kr/@yesasimpson/51


아기가 나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고 순간의 위기감으로 장난감 카메라를 사주고, 스스로도 똑딱이 카메라를 사서 '무목적성'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이 시간들을 지나올 때, 바로 그다음 날의 업무에 복귀하느라 최종적으로 도달하지 못했던 하나의 질문이 있다. 아래의 문장은 애초에 첫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시 던지는 질문이자,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나는 성공적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까? 삶과 일의 선순환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하나마나 한 수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이 간단한 수정에는 고난의 2020년을 보내면서 열매 맺은 단 하나의 깨달음이 뿌리내려 있다. 말하자면, '병행'이라 함은 어느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아와 일을 '병행'한다? 육아는 육아고, 일은 일이다? 너무 상식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가 무너지면 다른 한 가지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말은 완전히 틀릴 때가 있다. 육아와 일은 한 몸일 때, 아니 한 몸이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이건 내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문제는 육아가 아니야, 바보야!


이전 ​에 썼듯, 2020년은 '일'이라는 거대한 관념 그 자체에 대해서 재고하게 된 해였다. 나에게 어떤 일이 위임되어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고, 아무리 정리하려고 해도 정리할 수 없는 축축 늘어진 시간들과 과제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시간관념이 무너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들이 몸에 찾아왔다. 업무는 무엇이든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권한과 책임이 불분명했다. 어느 순간 내 영역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바로 다음 순간에 타인에 의해서 완전히 수정되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오는 번아웃이 아니라,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부과되는 납득할 수 없는 과제를 간단하게 처리해버리고 하루 20시간 동안 회사에 몸이 묶여 있으면서 온통 다른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서 오는 번아웃이 나를 점령했다. 거의 매일 이른 오후에 출근했다가 아침 7시나 되어야 퇴근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처리하고, 그 일들이 내 개인의 삶에 어떤 가치를 가져다주느냐, 그 가치를 예상하고 내가 '기꺼이' 그 시간을 투자하느냐가 중요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커리어 엑셀레러레이터인 김나이 님이 폴인에 쓴 글을 인용한다. 이 글에서 내가 몇 개월 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워라밸이 좋다는 것이,
단순히 6시 '칼퇴근'이 가능하고,
출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할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느냐'입니다. (...)
우리가 일에 재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다면,
회사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든
우리는 '할 만하다'라고 느낄 것입니다.
반대로 일에 재미를 느낄 수 없고
왜 하는지 모르겠다면 아무리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취미를 가져도,
회사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 무너지자, 삶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내가 첫 글을 쓸 때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육아는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내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한 축이자 건강한 내 에너지가 가능케 하는 적극적인 활동이었다. 삶이 무너지자 육아라는 개념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다. 육아가 무너지자, 동반 양육자인 남편의 삶도 함께 무너졌다. 남편의 삶은 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했고, 거기엔 그 어떤 윤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싹 메마른 채로 순간을 때우기 위해 근근이 이어가는 삶을, 부부는 질질 끌어오고 있었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사실상 일은 내 삶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일에 몰두하느라 모든 개인적인 삶과 가정을 저버린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을 유지한다는 지점에서 그랬다. 2020년은 내가 그동안 일을 사랑하게 된 원동력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내 인생에서 아주 유의미하다.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결실은 꽤 크다.

자아효능감 같은 게 나한텐 거의 전부였나 보다. 정기적으로 하던 홈트레이닝, 독서모임, 전시 관람, 글쓰기 따위: 누군가에게는 잰 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루틴이 그저 내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부가적 요소라고 생각해왔었는데, 그 생각은 틀렸다는 게 올해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그 루틴이 바로 나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 완결성 있는 걸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게 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에게 가치 있어지는 체험은 반복되면서 나에게 그 알량한 자아효능감이란 걸 줬었나 보다. 그 단단한 느낌이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이불을 박차고 나와 덤벨을 든다거나 잡념 없이 책의 문장들에 집중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짓게 만들었었나 보다. 조금씩 재건해야 한다. 무너져 있는 조각들을 다시 다듬어서. 전과 조금 다른 형태일지언정. 주관적 프레임일 뿐이겠지만, 2020년은 아포칼립스의 시작이었다. 순간순간 때우는 삶에서, 조금 느리더라도 빚어내는 삶으로 이행하고자 한다. 가을이 왔다.(2020년 9월 12일)

자아효능감은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다. 이 단단한 느낌을 나는 일을 통해 얻는다. 이 느낌이 없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고, 내가 아닌 이 사람은 삶을 제대로 살지 않을뿐더러 육아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문제는 단순히 '육아와 일의 병행' 따위가 아니었다. 자아효능감이 독서, 운동, 작문, 그리고 육아까지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질문은 완전히 수정되었다. 사실, '방송국 옆 산부인과'라는 매거진은 1년에 한 번씩 업로드되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매거진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그 실패는 첫 질문을 잘못 던졌다는 데 기인한다. 조금 양보해서 첫 질문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Yes'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매거진에 글 업로드 주기는 지금보다 훨씬 정기적이고 잦았을 것이다. 내가 글을 써내는 그 주기가, 그 질문의 대답과 완전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자주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삶과 일이 선순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제 나는 이 매거진의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있다. 아마 다음 단계에서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계획이다. 우리 회사에서 내가 처음으로 '육아와 일을 성공적으로 병행하는' 워킹맘 PD가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NO'로 판명 났다. 이제 질문을 수정하고, 정기적으로 글을 업로드하면서 그 성공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매거진을 운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육아는 그 유기적인 모든 요소들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나는 삶의 변환점에 서 있다. 부디 구독자 여러분들이 이 게으른 매거진을 떠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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