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 뒤에 들리는 화음은
얼마 전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포스팅을 보았다.
한국인은 ‘하라지 뭐 어때’라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걔 재수한대. -> 하라지 뭐 어때
걔 전과할 거래 -> 하라지 뭐 어때
걔 누구랑 사귄대. -> 하라지 뭐 어때
자매품 "그럼 좀 어때 시발"도 있습니다
난 너무 멍청한 것 같아 -> 사람이 좀 멍청할 수도 있지 그러면 좀 어때 시발
남의 일에 과도하게 참견하고 자존감이 부족한 사회에 대해 유쾌하게 날린 한 방이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몇 개월 동안 마음 안에 묵혀만 두었던 생각을 글로 풀어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정기적으로 나를 찌르던 그것.
올해 봄, 내가 속한 연출팀은 장시간의 기획회의로 매일을 보냈다. 매일 오후 2시에 출근해서, 퇴근해보면 빠르면 새벽 2시, 아주 늦으면 새벽 5시였다. 프로그램 구성을 어떻게 할까. 세트장은 어떤 모양이 될까. 로고는? 제목은? 출연자는? 그들의 역할은? 그야말로 껌껌한 어둠에서부터 보일까 말까 한 빛줄기를 찾아나가는, 지난하고 고단한 작업이다.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든 생선가시.
"솔직히 정상적이려면 이러이러하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이게 정상이지."
선배의 입에서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정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단순한 말버릇인 듯도 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타인에게 동의를 구할 때, 무의식적으로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냥, 부여하는 수식어. 혹은 부여하는 '정상'이라는 지위.(씩이나.)
그럴 수 있지. 그게 말버릇일 수 있지. 그런 단어 좀 쓰면 좀 어때.
하고 넘기는 게 매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걸 어려워하는 것부터, 내가 이미 유연하지 못한 인간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상적'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되는 회의 진행 방식 - 이를테면 형식적인 의견 나눔(흔히들 '답정너'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미묘한 폭력, 그러니까 맞고 틀림이 없는 문제에 있어서 누군가의 의견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넘기는 것 같은 분위기 - 에,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회의실도 점점 조용해져 갔다. 늘 떠들썩한 창작자들 사이에서 놀듯이 일한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 누구보다도 주도적인 업무 방식을 사랑해왔다고 여긴 나조차도 금세,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의견 교환은 그 어떤 진보도 이뤄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다수가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게 있어도, 가늠하지 못할 그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진행하지 못했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생각하길 좋아해서 기획회의라는 과정을 참 즐기던 나는 나 자신에게 철저히 부정당했다. 이 틀 안에서 그런 아이디어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자기 검열.
나와 같은 세대라면 같은 세대일 수도 있는 그에게서 나는 정말 놀라운 점을 많이 발견했다. 거대한 시스템의 불합리함을 고발하는 인간형에 대해 '패배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결코 그 누구를 온전하게 믿는다거나 전문가의 권위 혹은 인사이트를 존중하는 일은 없었으며, 잘한 일에 대해 잘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뭘 한다고 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떨떠름해 보였다. 세상의 다채로운 사람들, 공존하는 가치관, 서로 다른 것이 만났을 때 커질 수 있는 에너지, 시너지 효과, 이런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면 뭘 해, 인간이 되어야지."라는 말만 남긴 우리 아빠의 모습이 겹쳤다.
나에게는 늘 어른이 된다는 것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정말 멋진 어른이란 사실은 아직까지는 편견이 없는 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 2020년은 유독 힘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뻣뻣함까지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내가 택한 A는 그가 택한 B에 부정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도 난 의연해야 했다. 생각이 일치할 때도 '우리 통했다' '흔쾌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항상 찝찝하게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기분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B와 C, 그리고 D, E를 고려해서 A에서 A' 혹은 A+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사랑하던 나에게서, 하루가 멀다 하고 부정적인 에너지가 새어 나왔다. 거울을 보면 낯설 정도로,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처리한다거나 어떻게 행동하는 게 '정상'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렇게도 '정상'의 감옥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그가 없이 진행되는 유닛 회의에서나 전문가와 직접 대면하여 진행하는 일에 있어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그 회의의 결과물엔 늘 최종 관문, 즉 '정상'이라는 필터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상기시킬 땐, 다시 마음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러기를 6개월이 지났다.
그러면 좀 어때 시발.
나는 많은 것을 놓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잣대에 나를 맞추면서 괴로워했고, 그동안 내가 쌓아온 그 모든 커리어를 부정하면서 모든 것을 수포로 돌리려 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나를 감옥 안에 가두기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감옥을 나가기로 했다. 감옥은 견고했지만, 그곳에 들어간 건 나였다. 견고한 감옥을 바깥에서 팔짱 끼고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방식대로 일을 하고, 그게 최종 아웃풋에 적용되지 않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협업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 방식을 보여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나는 이 일에서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건, 여러 면에서 팀에게 마이너스인 걸 알았다. 하지만 내가 살고 볼 일이었다. 산소가 필요했다. (아니, 과연 팀에 마이너스라고 그 누가 생각하긴 할까?)
감옥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니 세상에 '그럴 수도 있는' '그러라지 뭐 어때' 싶은 수많은 인생과 가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2020년은 모두에게 최악인 해 겠지만, 나에게도 정말 최악의 해였다. 어떻게 보면, 어른이 된 후로 이렇게나 미래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살아온 적이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도래하는 미래에 별로 큰 기대가 없었다. 여행을 가면 아름답겠지. 음악을 틀면 기분이 좋겠지.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맛있겠지. 행복하지만 덤덤한 날들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래간만에 아주 설레고 가슴이 뛴다. 가능성을 열면, 너무 다른 현실이 내 앞에 올 것이다.
완전히 정반대인 사람을 만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게 알게 된다는 점에서, 2020년의 이 경험은 내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다각도에서 스스로 인생을 어떻게 대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고 날카롭게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의 몇 장면을 보았다.
"내 나이쯤 되면 게임을 즐기지 않게 돼요. 사람들을 속이거나 하지 않고 진심을 말하게 돼요. 상대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고 진심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존경의 표시라는 걸 알게 되지요."
돌이켜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그 선배에게 내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정상의 감옥에서 나오고 나니 그에게 나를 맞추는 게 중요하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더 과감해졌다.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세이모어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그게 가장 유연한 어른의 행동이며, 그게 그 선배를 존경하는 길이다.
만일 신이 있다면, 지금쯤이 내 앞에 이런 장벽을 세우는 적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게 맞다면, 신의 의도가 적중했다. 나는 그만큼 자랐다. 나는 회사에 시간을 널어놓느라, 내 딸의 4살을 등 뒤로 흘려보냈다. 딸은 남편이 기르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잘 자랐다. 나는 딸을 기르지 못하는 대신, 나 자신을 기르는 중이다. 바야흐로 뉴노멀의 시대, 많은 것의 장벽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각자가 많이 찾아나서는 이때. 메가트렌드란 없고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정답을 발견하는 2020년에, 나는 나를 유연하게 바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