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주지 못하고 사탕처럼 빨고 빨아 닳아 없어질 때까지 듣는 음악들. 꼭 그런 곡이 있다. 10대부터 그런 음악들이 녹아 내 몸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 어디에 달려 있었는지 잊었다가 갑자기 어느 날 발견하면 그걸 똑 떼다가 잘 보이는 데다 옮겨 단다. 그 곡을 좋아하는 것은 똑같고, 위치는 달라서 나는 전과 같고 다른 사람이 된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심미적인 삶, 즉 감각에 탐닉하는 삶은 권태와 반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자신을 잃을 수 있는 방식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바로 그 앞 장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자신을 붙잡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그 ‘존재감’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했다. 고통을 겪을 때에만 우리 존재가 제대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란 불행을 이미 겪었고 그것이 일상적이라는 것을 알며, 의연하게 받아들인 단계에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후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에 탐닉해서 자기 자신을 잃었다가도 내가 이 비루한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다시 깨달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에 불행한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받아들이라고, 원래 삶은 무의미하고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라고, 내가 접하는 텍스트들이 말해준다. 나는 매 순간 같고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