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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정 Jul 03. 2019

원하는 사람과 저녁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면

<더 크라운>을 봤다면 공감 하실겁니다

저녁은 혼자 먹고 술은 같이 마시는 게 좋다. 나로선 저녁식사 자리에서 즐겁게 대화하는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대화는 메뉴판 보기와 주문하기, 주문한 음식 받기와 씹기를 하다 툭, 툭 끊어져버린다. 나는 둘은 못하는 모지리라. 우선순위가 모 아니면 도에 있는 짐승이라. 


내가 관찰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굳이 저녁을 먹자고 하고 싶다. 젓가락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지, 입에 뭘 넣고 우물 거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허리를 얼마나 곧게 펴는지, 턱을 얼마나 내미는지. 그런 사소한 태도를 내 것으로 가져오고 싶은 사람이랑은 굳이 저녁을 먹자고 하고 싶다. 


사소한 태도마저 내 맘에 쏙 들어서 베껴서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들이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그 태도를 닮고 싶은 태도를 닮은 사람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마거릿 공주로 출연 중인 배우 바네사 커비Vanessa Kirby 다. 


실제의 마거릿 공주나 실제의 바네사 커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마거릿으로 분한 바네사 커비는 몸가짐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를 3D 프린팅으로 베껴와 360도 돌려본 다음 매일 거울 앞에서 연습하고 싶다. (그녀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가 너무 예뻐 당장에 7만 7천 원짜리 진주 목걸이를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으로는 모자라다.) 수프를 떠서 입으로 가져가 자연스럽게 호록 떠 넣는 모습이나 등근육을 가지런하게 펼치고 어깨에 적당히 힘을 푼 채 담배 같은 걸 손에 들고 있는 모습들이 나를 완전히 매혹한다. 


그녀가 연기하는 마거릿 공주는 왕족의 기품을 가진 동시에 매우 인간적이다. 질투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못되게 굴기도 한다. 노래가 나오면 춤을 추고, 짜증이 날 때는 시중드는 하인에게 소리 지른다. 연인을 유혹할 때는 도발적이고, 나를 배신한 남자한텐 욕을 퍼붓는다. 옷장이 터져나가지만 영국 여왕을 대신해 연설 자리에 설 때는 여왕만 쓸 수 있는 티아라를 탐낸다. 딱딱한 연설문을 제 멋대로 바꿔 관료들을 당황케 하며 홀로 빛날 수 있는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바네사 커비가 연기하는 마거릿 공주가 좋다.  자기애와  자기연민 속에서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왕족의 기품으로 그것을 도톰하게 가린 모습들. 공주라면 그래야지, 물 잔을 드는 정도의 수고가 드는 일엔 우아함이 넘치지만 나를 귀찮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면 밥상을 엎을 줄도 알아야지.


뭘 먹느냐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양식이면 좋겠다. 유럽에 사는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우아한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 그녀를 관찰하는 저녁 식사는 얼마나 즐거울까. 식탁을 내려다보는 눈꺼풀의 각도까지 재서 나한테 입히고 싶을 것 같다. 밥을 맛있게 먹고 계산은 그녀가 하게 해야지. 그래야 술을 내가 사겠다고 하면서 술 마시는 모습까지 베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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