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Oct 13. 2023

명예와 진실, 언어로서의 정의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974

정확한 언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마음이 어지러울 때, 떠다니는 말들이 나의 마음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순간에 특히 그렇다. 언어를 벼리고 벼려서만 겨우 전해질 마음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동안, 애석하게도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닿을 거란 확신이 오히려 점점 옅어져 갈 때. 그럴 때 나는 글을 쓰고, 또 글을 읽는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살해한 사건에 관한 르포 형식의 기록이다. 스물일곱 살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주목을 받을 일이 (아마도) 거의 없었을 카타리나의 인생은,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밤부터 있었던 일련의 평범한 일들에 대한 유력 일간지의 보도로 인해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녀의 살인은 이를테면 그 내리막길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을 텐데, 흥미로운 것은 그 종착점이 책의 도입부에 이미 명시적으로 서술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독자는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염두에 둔 채로 사건에 관한 기록을 읽어나가게 된다. 이 책에서 카타리나의 살인은 파편화된 기록들을 하나의 단위로 엮는 강력한 구심점이 된다.


그러나 작중에 담긴 세계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므로, 당연하게도 그 안의 사람들은 카타리나가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한다. 이로부터 그 세계에 속한 대중과 현실의 독자가 갖는 저널리즘에 대한 윤리 감각이 극적으로 유리된다. 독자는 이 책에서 살인이라는 파국을 초래하는 결정적 원인으로서 황색 저널리즘의 폭력을 목도하지만, 해당 저널리즘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세계의 대중에게는 그것이 그저 드러난 사실관계의 임의적인 조각(彫刻)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긴, 어느 정도의 언어적 정치(政治)는 범인(凡人)의 삶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 글을 쓰고 읽는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행간에 담긴 의미를 적당히 지나쳐 갈 줄 아는 ‘요령’인지도 모른다.


그 요령이, 카타리나에겐 없다. 작중에서 ‘《차이퉁》지’의 기사로 표상되는 언론의 기만적인 저널리즘은 카타리나를 분노와 절망으로 내몰기에 충분하다. 복잡한 수사를 걷어내고 보면 사건의 표면적 개요는 간단하다. (카타리나 자신도 인정했다시피) 문제의 수요일 밤, 카타리나는 자신의 대모인 ‘엘제 볼터스하임 부인’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하고만 진심으로 애정 어린 춤을 추었고, 이후 그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와서 밤을 보낸 다음 이튿날 아침 알 수 없는 경로로 헤어졌다. 알고 보니 괴텐은 여러 강력 범죄 혐의로 오랫동안 수배에 오른 인물이었기에 그날도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경찰은 그가 카타리나의 집에 들어가는 것만 보았을 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에 경찰은 카타리나가 의도적으로 괴텐의 도주를 도왔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조사에 들어간다. 한편 《차이퉁》 소속 기자 베르너 퇴트게스는 이 사안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내보내는데, 그는 신중한 자세로 사안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대신 연일 카타리나의 개인사를 교묘하게 각색하여 흘려보내는 식으로 대중의 흥미를 자극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카타리나의 살인 행위에 앞서 참작할 만한 동기로 성립할 수 있을까. 혹은 그녀에게 최소한의 면죄부를 쥐어줄 수 있을까.


이쯤에서 작품의 부제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문장으로 표현된 부제는 책이 다루는 주제를 단호한 어조로 전달한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라는 개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언론의 폭력은, 이어진 살인사건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세상의 모든 폭력과 기만이 살인으로 비화하는 것은 아니나, 이 책에 기록된 일들의 전개 과정이 끝내 살인으로 귀결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필연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만약 이 느낌에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면 카타리나의 살인 행위는 그녀 한 사람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으며, 퇴트게스의 죽음 역시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죄업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숙련된 기만의 대가가 죽음으로까지 번질 수 있단 말인가.


답을 하기 위해 우리는 진실의 속성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의 진실에는 여러 개의 층위가 존재한다. 경찰은 카타리나가 괴텐의 도주를 도왔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볼터스하임 부인과 블룸의 집 전화를 각각 도청할 것을 지시했다. 그것이 경찰의 입장에서 추구하는 사안의 진실, 즉 카타리나의 공범 여부를 밝히는 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와 독자의 시선은 보다 깊은 층위의 진실을 향한다. 예컨대 경찰의 수사 방식은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진실은 과연 도청될 수 있는가. 퇴트게스의 기사는 언론의 원칙에 부합하는가. 그가 직접 발로 뛰며 쓴 기사들이 단 한 번이라도, 진실의 아주 작은 파편이라도 추구해 본 적이 있는가. 독자가 이 질문들에 그리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이미 진실을 추구하는 기록의 한 형태를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카타리나를 둘러싸고 벌어진 현상을 독자에게 중계하는 이 책의 서술방식이야말로 퇴트게스의 그것과 눈에 띄게 대비되는, ‘진짜 저널리즘’이라 할 만하다. 그 앞에서 부패한 언론의 기만은 낱낱이 폭로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카타리나의 내면에 형상화되어 있다. 개인 내면의 진실이란 불변의 형태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어서, 카타리나는 그것을 빈틈없이 논리적인 진술로 직조(織造)해내지는 못한다. 다만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고자 부단히 애쓸 뿐이다. 심문 과정에서 카타리나가 보인 완고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그녀에게 언어란 진실을 정치(精緻)하게 드러내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듯하다. 이 맥락에서 퇴트게스의 죄는 단지 카타리나의 사생활을 폭로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진실을 드러내어야 할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외려 진실을 호도하거나 기만하는 수단으로 오용함으로써 언어 그 자체를 더럽힌 혐의를 받는다. 결국 퇴트게스의 죽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카타리나 내면의 진실을 훼손하고, 그럼으로써 그녀의 명예를 불가역적으로 실추시킨 데 대한 징벌로 읽힌다. 이 서사의 시작과 끝에서 퇴트게스가 죽는 것이 그토록 필연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언어야말로 하인리히 뵐이 말하는 정의의 동의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다시금 정확한 언어가 필요한 순간이다. 진실이 희박해진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어떠한 언어로 나와 타인에 관해 부정확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가. 붙박이지 않는 진실은 아직도 저 물밑에 있고, 다분히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하나의 진실을 찾아 글을 쓰고 읽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러를 좋아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