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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l 10. 2023

호러를 좋아하세요

배예람, 『소름이 돋는다』, 참새책방, 2023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악령과 괴물이 나오는 이야기,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의 이야기, 추격자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이야기, 물밑을 유영하는 포식자의 이야기, 우주적 공포를 다루는 이야기, 익숙한 세계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하는 이야기, 그 밖에도 아무튼 피가 튀고 유혈이 낭자한, 그렇고 그런 수많은 이야기들에 적잖은 애정을 품고 살아가는 중이다.


단,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맘 편히 즐기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 그건,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이다. 다시 말해 저 무시무시한 것들이 나와 내 주변의 현실에는 절대 침투하지 못하리라는 확신, 그리하여 나의 무탈하고 지루한 일상이 내일도 변함없이 이어지리라는 확신이다. 이 확신의 하한선이 무너지면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이야기로서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확신이 흐릿해지는 경우를 생각보다 자주 본다. 많은 경우 호러물의 핵심 발상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피해와 그에 대한 공포를 기반으로 하여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2023)의 '나미(천우희)'는 술에 취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린 날 이후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강력범죄의 타깃이 되는데,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이처럼 특정 개인의 민감정보를 인질 삼아 피해자를 협박하고 약탈하고 학대하는 범죄가 현실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장르적 쾌감으로서의 공포보다 끔찍한 사건 소식을 접했을 때의 현실적 공포를 더욱 크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내게 이 영화는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이토록 끔찍한 일들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라는 경고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비단 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다 상대적인 것이다. 나에게 완벽한 픽션으로 작동하는 호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현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게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가능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호러물을 맘 편히 즐긴다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각자가 스스로 허용한 기준의 한계치 안에서만 가능한 일종의 자기기만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현실적인 장치가 필요하고, 그러한 장치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호러물을 소비한다는 건, 타인이 겪는 불행의 한 조각으로 장르적 스릴을 취하는 둔감하고 나태한 자기기만행위가 아니겠느냐는 물음 또한 가능해진다.


글쎄, 이런 의구심의 맞은편에는 언제나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 또한 자주 그 말의 권위에 기대어 온갖 장르물을 소비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의 세계에 현실의 잣대를 들이미는 모든 시도가 다 헛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정교하게 연출된 공포가 어떤 현실을 물처럼 투영하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배예람의 『소름이 돋는다』는 반가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종 공포물의 매혹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우리 사회와 역사의 일면을 어떤 식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는다. 그 고민은 우리가 공포물을 소비하는 여러 층위의 맥락이 충분히 윤리적인가 하는 질문과 닿아있고, 이는 물론 앞서 언급한 의구심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누군가에겐 지나치게 예민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한 장르를 정말로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이렇듯 개개의 콘텐츠가 소비되는 사회적 맥락을 섬세하게 돌이켜보고 윤리적으로 다듬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사랑스러운 겁쟁이들을 위한 호러 예찬'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어느 호러 애호가가 장르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서 쓴 호러 예찬 에세이이다. 보기에 따라선 호러 입문자들을 위한 가이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책은 천생 '겁쟁이'인 저자가 어떻게 호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나아가 호러물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하여 다채로운 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취향이 같은 친구를 만나 반나절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평소에 호러를 좋아했거나 이제 막 호러 장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독자라면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고, 그 동질감이 다소 마니악한 취향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책에 따르면 겁이 많은 것, 그래서 공포를 잘 느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만큼 무서운 이야기를 밀도 있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서운 이야기를 보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피가 얼어붙는 공포가 들이닥치는 바로 그 순간에 찰나의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다. 그러니 공포 영화만 보면 마음이 조마조마해 눈과 귀를 가리기 급급한 태생적인 겁쟁이들은 실은 누구보다 가성비 높은 공포를 즐기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무서운 것을 보아도 그저 무덤덤한 강심장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책은 챕터별로 저자 자신이 인상 깊게 보았던 여러 작품을 예로 들며, 그 안에서 어떤 포인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과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지 흥미롭게 설명해 준다. 호러 장르에 속해있다고 해서 다 같은 호러가 아니고 이야기마다 소재나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다르므로, 이러한 분석은 독자에게 꽤나 유용한 지침이 되어준다. 다루는 소재의 폭도 넓다. 독자는 이 책에서 정체불명의 시선이나 악령과 같은 고전적인 공포부터 하우스 호러의 몇몇 대표작을 거쳐 공포 게임과 코스믹 호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종다양한 논의를 접하게 된다. 그중 어떤 것은 간단한 검색을 통해 곧바로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마음이 동한다면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몰랐던 세계를 탐험하는 동안 호러라는 장르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수많은 겁쟁이들에게 얼마나 환상적인 놀이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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