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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10. 2023

책으로만 닿을 수 있는 진실

루스 오제키, 『우주를 듣는 소년』, 인플루엔셜, 2023

장장 696쪽에 달하는 벽돌책, 루스 오제키Ruth Ozeki의 『우주를 듣는 소년The Book of Form and Emptiness』을 보았다. 한 권의 책으로서 이 정도의 중량감을 안겨주는 소설을 읽어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다 읽었을 때 커다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주를 듣는 소년』은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소년의 이야기이면서 책의 본질적 속성과 그 생명력에 주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책과 소년의 대화 형식을 띠고 있으며, 둘이 서로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내용은 이 이야기의 가장 바깥쪽 액자를 구성하고 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책은 살아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책이 살아있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이 글에서는 책이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있다는 소설의 전제를 받아들인 채로 생각을 이어가 보려 한다.


책을 '인간이 쓰고 엮은 기록의 총체'라고 느슨하게 정의한다면, 그것은 인간 존재를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응시해 온 사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들이 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적지 않은 시간과 정신적 긴장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만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책이 담고 있는 타인의 삶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그들이 품고 있는 진실에 귀 기울이며 비로소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우리는 타인에게 완전히 닫혀 있고, 그것을 열 필요를 티끌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일련의 혐오주의자들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나의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없고, 그것은 대개 저쪽에서도 피차일반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는 평생 서로가 품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모른 채 짧은 생을 살고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나에게, 그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액자 안에는 주인공 소년 '베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베니의 아빠 '켄지'가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켄지는 잔뜩 취한 채 도로에 누워 있다가 트럭에 치여 죽었다. 그리 고상하거나 매력적인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때때로 죽음은 이렇듯 볼품없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베니는 엄마 '애너벨'과 함께 남은 가족의 삶을 이어가지만 익숙한 일상은 낯설게 재편되어 베니의 인생을 통째로 쥐고 흔든다. 이때부터 베니는 온갖 사물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럼으로써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사건과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


아빠가 죽은 시점에 베니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고, 이야기가 주로 전개되는 시점은 그로부터 2년 후라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절묘한 구석이 있다. 베니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가는 길목의 초입에서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니까 베니가 겪는 진통의 일부는 성장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경험으로 해석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훨씬 격하게 증폭되는 면이 있는 것이다. 베니의 삶은 시종 불안하고 위태로우며, 혼란하고 애처롭다. 이 책은 그런 베니를 오롯이 이해하는 단 하나의 존재이다. 독자는 그동안 평범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닿을 수 없었던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도달한다. 그것은 책으로만 닿을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진실이며, 또한 한 사람의 인간성을 바라보는 가장 밀도 높은 시선이라 할만하다.


문득 나를 아는 책, 나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책을 떠올려 보았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약속의 땅Das Gelobte Land』(1998)은 내가 중학생 때 읽었던 책이다. 올해 초까지도 고향집 책장에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고 난 그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방치해두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두어 달쯤 전에 가지고 왔다. 가져올 때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았어도 그것들은  내 책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표지가 빛바랜 시간을 가만히 담아내고 있었다. 펼쳐보니 내지도 그만큼 우글쭈글하게 삭아 있다.


나는 저 책이 처음에 어떻게 우리 집에 왔는지 알지 못한다. 기억하는 것은 내가 중학생의 어느 한 시기를 이 책에 푹 빠져 지냈다는 것뿐이다. 당시엔 이 작가가 그 유명한 『서부 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1929)를 쓴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책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며 읽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곳곳에 손때가 묻은 흔적이 남아 내 한 시절의 치열한 독서를 증언하고 있다. 이 책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 미리 알고 나를 따라왔을까. 궁금해하며 다시금 오랜 책을 펼쳐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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