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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03. 2023

돌보는 이를 돌보는 SF

이경,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래빗홀, 2023

* 쪽수: 304쪽



연휴에 마카오,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휴가 때면 으레 한두 권의 책을 가지고 가서 읽는데, 이번에는 두 권을 가져가서 한 권 반을 읽었다. 오늘은 그중 '한 권'에 해당하는 책을 소개한다. 이경의 SF 소설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이다.


책에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다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은 소재는 육아와 돌봄 노동이다. 작가는 알려진 SF 문법을 경유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행위의 비상함을 기발하게 드러낸다. 첫 작품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의 첫 문장은 이렇다. '어느 날 밤 안방 문을 열었더니 거실 소파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앉아 있었다.' 뜬금없이 남의 집 소파에 앉아 있는 이 스웨덴 배우의 정체는, 얼마 전 미주가 사 온 최신형 젖병 소독기에 탑재된 자체 AI이다. AI로 젖병 소독기의 차별화를 꾀한 '주식회사 베이비케어'의 CEO 인터뷰에 따르면, '베이비케어가 지금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 된 이유는, 우리가 아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지만, 그들은 정작 '실제로 우리 제품을 구매하고 설치하고 매일매일 아기를 위해 제품을 구동하는 사용자에 대해선 놀랄 만큼 적은 것을 알고 있었'다(28-29쪽). 그래서 '아기가 아닌 사용자와 친근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사용자의 고립감을 덜어내고 기분 전환을 돕기에 최적화된 대화형 비주얼라이즈드 AI'를 개발한 것이다(33-34쪽). 그러니까, 이 한국어에 능통한 스웨덴 배우는 젖병 소독기를 켜고 끄는 기계적인 기능에 더하여 고객과 인간적 상호작용을 하도록 설계된 AI인 것이다. 이처럼 어느 평범한 집 거실을 배경으로 묘사된 가상의 육아 현장에서, 독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삶과 노동의 무게를 가까스로 어림해 보게 된다.


그러나 책은 단순히 육아의 고됨을 말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표제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의 끝문장은 이렇다. '이안아, 어쨌든 지금 엄마가 갈게!' 엄마가 아이에게 가겠다고 하는 이 당연해 보이는 선언이 특히 인상 깊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이야기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육아로봇을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기의 답 없는 칭얼거림에 결코 소모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로봇이야말로 육아와 돌봄에 최적화된 존재가 아닐까. 지금도 스마트폰만 쥐어주면 마법처럼 울음을 뚝 그치는 영아들이 세상에 한가득인데, 몇 발 더 나아가 정교한 육아전문로봇을 개발하여 육아로부터 완전 해방을 노리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이야기 속 '황새영아송영' 서비스는 그러한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다. 주인공 '혜인'은 황새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타고 서울에서 남해로 이동하는 동안 잠시 육아로부터 해방되지만, 종국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안'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조건 없이 아기를 돌보는 이들의 욕구가 무참히 짓밟히고 마는 육아의 현실을 생각했을 때, 혜인의 저러한 결심에서 독자는 실로 한 세계를 떠받치는 강인함을 보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는 난해하기로 이름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일부를 코미디 소품처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 속에 제시된 딜레마를 유쾌하게 매듭짓는 작품이다. '장옥련'은 의식을 잃은 존엄사 신청인이고, '구공일'은 장옥련의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는 데에 필요한 법정 입회인으로 지정된 간병 로봇이다. 문제는 이야기 속 세계의 법이 로봇에게 존엄사 입회인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즉, 장옥련의 존엄사에는 절차적 하자가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는 수밖에 없다. 인물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옆에서 듣고 있던 광기의 9급 서기보 '김명수'가 돌연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여 기적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구공일을 장옥련의 친족으로 기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구공일의 존엄사 입회인 자격을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면 억지스러운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이 이야기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행위에 대해, 그리고 인간성을 정의하는 방식에 대해 예리하고도 포용적인 통찰을 제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책은 인간 아닌 존재들을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시키며 그들 각자의 개성을 비중 있게 드러내고 있다. 「만물의 앎에는 참으로 끝이 없다」에서 끝없는 배움의 여정에 놓이는 주체는 생소하게도 굿을 하는 로봇이고, 「보편적인 내 엉덩이」에서 뛰어난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을 보유하고 전수하는 주체는 사람도 로봇도 아닌 무언가이며, 「채팅GPT의 신들」에서 33번 우주에 머물며 인간들이 던지는 오만 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이들은 무정형의 신들 또는 유령들이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구도 뻔하거나 진부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혀를 내두르게 되는 기발함으로, 작가는 인간 아닌 존재들을 각 서사의 구심점으로 삼아 의미심장한 전개를 이끌어간다.


이렇듯 낯선 존재들을 내세워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그 답도 결국엔 '돌봄'이라는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와 간병이라는 소재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앞의 세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그 뒤의 작품들에서도 외로운 존재를 향한 작가의 시선은 일관되게 이어진다. 특징적인 것은 이 시선이 일반적으로 돌봄이 일어나는 상황의 도식을 한 층 입체적으로 보게끔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돌봄의 대상으로서의 약자보다 돌봄의 의무를 짊어지는 주체에게 있다. 그저 말없이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만 했던 이들은 이경의 SF에서 비로소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고 한숨 돌리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한국 SF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간 육아의 주체로서 어머니란 존재를 위로하는 작품은 종종 보았지만, 그러한 위로를 모종의 인공존재에까지 확장하여 폭넓게 적용하는 작품은 아직까지도 생소하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SF가 아니라면, 그 누가 로봇과 인공지능과 형체 없는 데이터를 이처럼 섬세하게 보듬어 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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