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Dec 13. 2023

갖은 시끄러움 속에서도

김선미, 『비스킷』, 위즈덤하우스, 2023

* 쪽수: 228쪽



작품 속에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사물, 현상, 발상, 설정 등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명명'은 장르 세계에서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기법 중 하나입니다. 예컨대 이희영의 『페인트』(2019)에서 '페인트'는 물감이 아니라 Parent's Interview, 즉 부모면접의 준말로 쓰였지요. 박소영의 『스노볼』(2020)에서 '스노볼'도 눈덩이나 스노글로브가 아니라 혹한의 세계에 지어진 돔 형태의 거주구역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건 일종의 약속입니다. 작품 속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설정에 대해 이건 '페인트'라고 부르겠다, 저건 '스노볼'이라고 부르겠다, 하는 식이죠. 장르 세계에서 명명은 자칫 구구절절해질 수 있는 설명을 단 몇 음절로 단축시키는 매우 경제적인 장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 지은 이름은 독자에게 작품의 발상을 매우 직관적으로 이해시켜 주기도 하지요.


『비스킷』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 이야기에서 '비스킷'은 '존재감이 없어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인공 '성제성'이 고안해 내 자기 주변의 몇 사람하고만 공유하는 개념이지요. 제성이 이 말을 만들어내게 된 건, 다른 사람에겐 잘 안 보이는 비스킷들이 제성에겐 미약하게나마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지워질 듯 위태로운 이들을 따로 부를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죠. 물론 작가와 독자 입장에서는 '존재감이 없어 잘 안 보이는 사람'이란 개념을 세 음절로 단축시킬 수 있다는 실용적 이점도 있고요.


어쨌거나 이 세계의 비스킷들에겐 비슷비슷한 사연들이 있는데, 바로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거나 소외되어 자존감이 낮아졌다는 겁니다. 제성은 이들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단계는 반으로 쪼개진 상태이고, 2단계는 조각난 상태이며, 3단계는 부스러기 상태입니다. 비스킷의 잘 부서지는 특징을 반영한 발상이지요. 단계가 올라갈수록 존재감이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비스킷들이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서 주인공이 할 일은 마땅히 그들을 구하는 일이어야겠죠. 제성은 비스킷의 존재를 그들이 내는 소리로 감지합니다. 미약한 이들의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이야기는 제성에게 극도로 예민한 청각을 무기로 쥐어주지요. 제성은 소리 강박증, 청각 과민증, 소리 공포증이라는 세 겹의 약점을 두르고 있는데, 한편으로 이것은 제성이 지워져 가는 존재의 아픔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강점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이건 당연히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요컨대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우리 사회가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에 지금보다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겠죠.


책의 목차는 열 개의 '시끄러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챕터의 타이틀은 '학원의 시끄러움', '이사의 시끄러움', '층간의 시끄러움', 이렇게 ‘ㅇㅇ의 시끄러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시끄러움 속에 의미 있는 사건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삽입되지요. 이 사건들은 전체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예민한 청각의 소유자인 제성이 세상 만물을 '시끄럽다'고 느끼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채워져 있고, 그것들이 연결되어 전체 서사의 굴곡이 드러나는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전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장점이 구조적으로 참신한 시도에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 작품은 장점만큼이나 아쉬운 점도 뚜렷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제성 외에도 '효진', '덕환', '도주', '조제'와 같은 친구들이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데, 이중 도주, 조제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전부 들어내도 무방할 정도로 전체 서사와 따로 놉니다. 이야기를 하다 만 느낌도 들고요. 다루는 주제의 초점도 흐릿해요. 이 작품이 드러내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무엇보다 폭력과 학대로 인한 인간 소외일 텐데, 이야기는 환경 문제,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 미성숙한 부모, 학교폭력과 같은 소재에도 제가끔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루는 서사는 대체로 안일하고 일관적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에 따라 결말로 갈수록 동력이 떨어지게 되지요. 그리고 유머 코드가 끼어드는 장면이 드물게 있는데, 불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전 유머 코드의 삽입이 작품 톤에 따라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고 보고, 유머 감각이 없다면 아예 시도하지 않는 편이 확실히 낫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서 명확히 비스킷으로 기술된 인물은 모두 다섯인데, 읽기에 따라선 몇 명 더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성의 부모가 실은 둘 다 비스킷이었다고 해도 별 이질감은 없거든요. 특히 제성의 아버지가 제성에게 보인 형편없는 태도와, 그럼에도 그에게 제대로 된 반성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차라리 그가 비스킷이었다고 하는 쪽이 한결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제성의 아버지는 끝까지 비겁한 인간으로 남았고, 제성은 그런 아버지에게 끝내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라는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