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an 14. 2024

안 맞아도 좋은 이유

전수경, 『아빠랑 안 맞아!』, 창비, 2022

* 쪽수: 132쪽



주인공 '이하루'는 3학년 여자아이입니다. 프로그램 개발자인 엄마는 어느 날 좋은 일자리가 생겼다며 혼자 부산에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빠는 하루가 아직 어리다며 엄마를 말려 보지만, 엄마는 이미 육아 때문에 세 번이나 휴직을 했습니다. 아빠는 한 번도 휴직하지 않았고요. 결국 이번엔 아빠가 육아 휴직을 내고 하루를 돌보기로 하고, 엄마는 일을 하러 떠납니다.


도입부의 장면을 통해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동안 이 집안의 돌봄 노동을 도맡아 해온 사람이 엄마라는 것이고, 그런 엄마가 자리를 비운 동안 하루가 돌봄에 서툰 아빠와 둘이서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놀라울 것 없는 설정인데도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지지요. 이런 설정은 이야기의 세계에서 종종 쓰이는 기술적인 성반전과도 관련 있습니다. 인물 설정 단계에서 기존에 관습적으로 고정되었던 성역할을 뒤집어 제시하거나 주요 인물의 성을 바꾸는 것만으로 전체적인 스토리라인과 디테일이 모두 크게 달라지는 것이죠.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인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돌봄 노동의 주체를 아빠로 설정함으로써 그런 시도를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이 독자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도 유의미한 설정이라고 봅니다. 전 이 이야기가 수많은 한국 어린이 독자에게 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자녀를 돌보는 주체는 명백히 '엄마'입니다. 온 나라에 걸쳐 너무도 당연하게 전제되는 기본값이라 개인이 이를 부당하다고 여기고 이의를 제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지요. 육아를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고, 교육기관에서 수집하는 학부모 연락처는 대부분 엄마의 전화번호입니다. 먹이고 입히는 것,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 자녀의 건강과 학습에 관한 정보를 꼼꼼히 체크하는 것, 자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것은 모두 엄마의 일입니다. 물론 안 그런 집도 많아요. 이른바 가정의 '주 양육자'가 엄마가 아닌 경우도 많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든, 현재로선 조금 특별한 취급을 받게 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빠랑 안 맞아!』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이런 씁쓸한 현실이 작품 바깥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빠랑 안 맞아!』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한편으로 이 작품은 생활밀착형 동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는 하루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읽고 있으면 정말 저 나이 또래의 어린이가 일상 속에서 할 만한 생각들이 문장마다 꼭꼭 눌려 담겨 있습니다. 특히 하루의 눈을 통해 보는 아빠의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고요. 웃기고 어설프고 엉뚱한데 멋있기까지 합니다. 그간 엄마의 방식에 익숙해졌을 하루가 엄마의 부재로 인해 아빠의 다채로운 면모를 알아가게 되는 것은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지요. 전 관계의 질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엄마의 취직과 아빠의 휴직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도 참 좋은 소재입니다.


이야기의 톤은 전체적으로 밝고 유쾌합니다. 그럴 수 있는 건 하루와 하루의 아빠가 기본적으로 유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고요. 이들이 각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허술함은 엄마가 집에 있었다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종류의 것들이고, 그래서 이야기의 재료로서는 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각' 챕터에서 하루가 지각을 하게 된 이유는 늦잠을 잤기 때문인데, 그 전날 하루의 아빠는 새벽까지 좀비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아빠의 휴대폰에는 엄마와 담임 선생님의 부재중 전화가 몇 통씩 와 있고요.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상황이지만 두 사람은 허둥지둥 대면서도 결국 근사한 하루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엄마가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종의 일탈이고 낭만이지요. 알다시피 삶에는 이런 경험도 한 번씩 필요합니다.


시간적으론 봄날의 새 학기부터 여름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1년짜리 일을 하러 떠났으니,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하루가 아빠와 둘이 보낼 시간은 아직도 세 계절 정도 남았을 겁니다. 물론 부산이 그렇게 먼 곳은 아니어서 하루는 주말마다 엄마를 볼 수 있지만, 이 이야기는 엄마가 있는 주말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아요.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 부녀가 자꾸만 삐그덕거리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재미있고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하루는 안 맞는 아빠와 둘이 살면서 조금씩 괜찮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두 사람이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동안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소중한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서로에게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낯익은 괴물, 인상적인 호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