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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07. 2024

불화하는 동심에 대하여

《아동문학평론》 2024년 여름호(통권 191호) - 이 계절의 비평

박용숙, 「까마귀 아주머니」

윤슬빛, 「다음 공을 던질 차례」

최수주, 「동갑내기」


1. 들어가며


동화가 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이 질문에 물론 정답은 없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동화를 읽고 쓰는 이에게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개인의 주관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 대답 안에 그의 동화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녹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선 질문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들리기도 한다. ‘당신은 동화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알기로 이에 대해 가장 흔한 대답은 '동심'이다. 동화는 어떤 형태로든 어린이의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 품이 넓은 대답이라 틀린 말이 될 소지가 적다. 이 대답은 한동안 동화의 본질을 묻는 물음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 주었다.

문제는 하나의 언어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동안 정작 그 언어가 지칭하는 현상이 흐릿해졌다는 사실에 있다. 동심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간 수많은 이들이 동화와 동심을 한데 엮어 말해왔지만 해부의 대상은 언제나 동화라는 텍스트와 그 주변의 맥락이었을 뿐이다. 동심은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이므로 별도의 인문학적 분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국 누구나 동심을 말하지만 감히 아무도 동심을 정의하지 않는 지점에서 기우뚱한 균형이 성립한다. 이는 동화라는 장에서 가장 강력한 불문율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이 꽤 괜찮은 대답으로 매끄럽게 대체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진부함이라는 부작용이 따라붙는다. 동화가 동심을 반영해야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렇게 모호한 대답으로 만만하게 건져 올릴 수 있는 의미란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당신은 그 대답을 정말로 신뢰하는가.

오해가 없도록 이쯤에서 미리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나는 동심에 관한 모든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동화가 동심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쓰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것은 동화의 본질이라기보다 전제에 해당하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동화란, 어린이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는 매체다. 동심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동화가 아니다. 하지만 동심을 궁금해하는 모든 이야기가 동화의 본질을 관통하던가. 그렇지는 않다. 동화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것이 동심이란 한 단어로 간단히 압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 글에서 다루는 핵심도 이와 맞닿아있다. 요컨대 동화의 본질은 단 하나의 낱말이나 개념으로 압축,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동화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본질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본질을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각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양한 동화를 읽고, 좋거나 아쉽다는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의 준거를 언어적으로 정밀하게 드러내야 한다. 동화를 읽고 쓰는 이들에 의해 생산된 1, 2차 텍스트를 끊임없이 접하고 각자의 프레임을 다듬어야 한다. 동화의 본질은 바로 그 과정에서 상호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감각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즉 동화의 본질은 동화를 읽고 쓰는 순간순간의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본질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나는 그간 동화계에서 누적된 몇 가지 아이러니와 그것들로 빚어낸 암묵적인 규칙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동심에 관한 불문율도 그중 하나다. 이를 바탕으로 한 논의는 어쩔 수 없이 자주 모호해지겠지만 나는 그 모든 알쏭달쏭한 과정 안에 정말로 쓸만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믿는다.


2. 동화가 현실에 맞서는 방식


동화 속 주인공은 종종 제 물리적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회적 문제들에 직면하곤 한다.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을 설정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그럴 때 ‘현실은 더 심하다’라는 식의 냉소와 푸념은 그다지 쓸모 있는 답변이 되어주지 못한다. 대부분의 독자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맥락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불행한 삶의 단면이 동화라는 무대 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일 것이고, 여기엔 어느 정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누구도 그 과정을 직접 목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어쩌다 이토록 차가운 현실 앞에 놓이게 되었을까.

박용숙의 「까마귀 아주머니」(≪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에는 한여름에도 검은 롱패딩을 입고 돌아다니는 노숙자 아주머니가 등장한다. ‘까마귀’는 이 아주머니의 별명이다. 주인공 ‘주안이’와 까마귀 아주머니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바, 이 작품이 지닌 문제의식에는 현대의 주거권 개념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 주안이네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더니 일 년 사이에 회오리바람이 되어 몰아쳤다. 친구들은 모두 이사 가고 철진이와 민호만 남았다. 말이 이사지 쫓겨난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새로 지어질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상가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주안이네 동네에는 빨간 스프레이로 쓴 ‘철거’라는 글자만 늘어 갔다.
지금 사는 연립 주택도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까지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아빠는 회사 마치면 대리운전을 하고, 엄마는 빵집 아르바이트도 모자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

박용숙, 「까마귀 아주머니」, 《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 66쪽


주안이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에서 까마귀 아주머니는 집이 없는 사람이고, 자신은 집에서 곧 쫓겨날 사람이다. 이것은 어린이가 넉넉히 감당할 만한 현실일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재개발, 철거, 빨간 스프레이, 노숙자와 같은 말들은 단편 동화 속 어린 인물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게 들린다.

문제는 이것이 성인에게조차 무난한 정도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거 불안정이라는 것이 성인이 겪는다고 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해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위협이다. 그러니 상황을 주거 불안정으로만 한정하여 본다면 어른과 어린이가 겪는 어려움은 질적으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까마귀 아주머니」는 어린이가 겪는 문제 상황을 성인의 그것과 유사하게 설정한 뒤, 어린 인물이 독자적으로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에서 이러한 서사가 특히 의미 있어 보이는 까닭은, 어른과 유사한 문제를 겪는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까마귀 아주머니」의 전개가 조금은 낯설고 엉뚱하게까지 보이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처음에 주안이는 철진이, 민호와 함께 놀이터 정글짐에다 종이 상자로 비밀기지를 만든다. 사는 집에서 곧 쫓겨나게 생긴 마당에 웬 놀이터 비밀기지인가 싶지만, 어린이의 투쟁은 어른의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주안이에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내 친구들만의 전용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고, 그럼으로써 정당하게 주거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비록 어른들이 만든 법과 제도의 승인을 받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주안이의 비밀기지가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가장 온전하고 합리적인 투쟁의 상징물임을 간파하게 된다.

이처럼 현상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어린이의 방식을 그가 속한 세계 안에서 유의미하게 펼쳐 보일 때, 독자는 비로소 동화 속 주인공이 처한 차가운 현실의 모순을 편견 없이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동화가 어린 인물들을 현실의 거대한 문제 앞으로 불러들이는 일의 당위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럴 때에도 여전히 정도의 문제는 남는다.


3. 불행의 정도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을 떠올려보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학동네, 2009)


이것은 한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야기와 캐릭터의 전제에 대해서도 훌륭한 지침을 제공한다. 예컨대 이 문장을 ―극히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이렇게 바꾸어 이해해도 뜻은 통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기만 한 주인공은 매력이 없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하려면, 주인공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불행해져야만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화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문제가 파생한다. 동화의 주인공은 대체로 어린이, 또는 어린이와 유사한 속성을 갖는 어떤 존재이다. 그런 존재에게 무지막지한 고통과 난관과 불행을 안겨주어도 되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어느 선에서 타협을 이루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전형적인 답변이 하나 있다. 극적 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어린 주인공에게 ‘지나친 불행’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화의 재미를 위해 현실의 불행을 지나치게 전시해서도 안 된다. 그럼 지나친 불행이란 무엇일까. 어느 정도로 불행해야 동화의 주인공에게 지나친 정도로 인식될까. 이에 대해서도 다분히 정형화된, 암묵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첫째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책임과 무관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불행이고, 둘째는 어린 몸과 마음으로 감당해 낼 도리가 없는 종류의 불행이다. 현실에 그런 불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동화 속 인물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기준은 지금까지도 일정 부분 유효하게 작동해 왔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윤슬빛의 「다음 공을 던질 차례」(≪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의 도입부다.


아빠가 감옥에 갔다. 경찰들이 집까지 들이닥쳤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아빠를 데려갔다. 그 뒤로 고모는 변호사를 구해 보겠다며 종종거리고 다녔다.
‘어차피 나와 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모에겐 말하지 않았다. 동생이 아니라 원수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아빠 흉을 보면 고모는 속상해했다. 아빠가 잡혀간 뒤로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밥을 먹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불쑥 아빠 생각이 났다. 딱히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냥, 이게 다 뭔가 싶었다.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 나까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윤슬빛, 「다음 공을 던질 차례」, 《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 87쪽


이 단편 동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겪는 어려움은 모두 ‘아빠가 감옥에 갔다.’라는 첫 문장으로 환원된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나’의 행동이나 책임과 무관하다. 하루아침에 범법자의 딸이 되어 아버지의 누나와 살게 된 상황 역시 당사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깊은 상흔을 남길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이 작품을 주인공에게 지나친 불행을 안긴 사례로 보아야 할까.

글쎄, 이 이야기를 읽기 전이라면 몰라도 읽고 난 지금은 좀처럼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 읽고 나니 주인공이 겪는 불행이 가볍게 느껴졌다거나, 갑자기 기준에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두 기준 모두에 큰 틀에서 동의한다. 다만 때때로 일반론적 기준과 규칙이 거의 무용하다고 느껴질 만큼 강한 설득력을 갖춘 작품이 있고, 「다음 공을 던질 차례」도 그런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이것은 사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간혹 동화에 관한 학술적 견해를 접할 때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반례로 쓸만한 작품 한두 개를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흔한 일이다. 문학은 과학이 아니어서 모든 문학 텍스트에 빠짐없이 들어맞는 법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동화를 읽고 쓰는 사람들에게 꽤나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법칙에도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본질을 탐색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동화의 본질이 특정 단어와 개념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동화를 읽고 쓰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형성된다고 했던 말과도 닿아있다.

「다음 공을 던질 차례」의 주인공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새를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땅에는 새끼 새 한 마리가 떨어져 울고 있고, 어미 새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나’와 친구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일행이 어미 새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며 새끼 새를 높은 나뭇가지 위에 무사히 올려놓으려는 순간, 허무하게도 새끼 새는 제힘으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듯.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고모에게 묻는다. “좋아하는 걸 해도 돼요? 아빠는 벌 받고 있는데, 내가, 나만.” 고모는 단호하게 말한다. “당연하지! 아빠는 아빠고 너는 너야.”

아빠가 감옥에 간 이후 불행해진 ‘나’에게 동화는 ‘아빠는 아빠고 너는 너’라고 말하며 앞으론 죄책감 없이 행복해져도 된다고 위로한다. 일면 당연하고 단순한 결론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동화 속 불행의 크기와 깊이와 강도가 주인공이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으로서 알맞게 기능했다는 지표로 해석된다. 이렇듯 제 책임과 무관한 불행으로 고통받는 모든 어린이의 마음에 깊이 남을 한 마디를 건네는 것으로, 나는 이 동화가 불행의 정도(正道)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4. 불화하는 동심


불행을 겪는 주인공이 언제나 절대적인 지지와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상처받은 동심은 외부 세계를 향한 공격적인 반응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동심이란 것이 언제나 선하고 순한 상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므로, 다양한 결의 동심을 묘사하고 탐구하는 것은 동화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최수주의 「동갑내기」(≪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는 어느 재혼 가정의 일상 속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우야-.”
교문 앞에서 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엄마는 입학할 때 며칠만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학교가 끝나면 교문 앞에 엄마들이 많이 서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우리 엄마를 찾으면서 자기 엄마의 손을 잡고 집에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봤다. 그런데 이 학교로 전학온 첫날,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기분이 좋은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겅중겅중 뛰면서 갔다. 아이들이 나를 부러워할 것 같았다.
교문 앞에 엄마 차가 세워져 있었다. 엄마가 차에 타라고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엇!”
어느새 왔는지 김형진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는 새아빠가 있었다.

최수주, 「동갑내기」, 《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 105-106쪽


알다시피 동화가 동심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비판과 반성은 종종 공론장을 넘어 동화를 읽고 쓰는 이들에게 직접 유용하고 생산적인 사유의 도구를 제공해 왔다. 동심을 표현하거나 이해함에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담론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다루는 경계를 뛰어넘어 다분히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나는 이것이 담론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품과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쟁점은 때때로 거칠게 표출되는 동심을 다루는 태도Attitude에 있다. 옳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동심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동갑내기」의 1인칭 주인공 ‘현우’는 엄마의 재혼으로 ‘새아빠’와 그의 아들 ‘김형진’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의형제 사이가 된 현우와 형진은 공교롭게도 동갑내기인데, 학년은 형진이 현우보다 하나 위다. 현우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현우는 형진을 끝까지 ‘김형진’이라 서술한다. ‘형진이’라 부르기엔 학년이 다른 데다 친밀감도 부족하고, 동갑내기를 ‘형’이라 부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뚜름한 불만은 이내 기싸움으로 번지다 급기야 주먹다짐이 된다.


나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김형진을 한 대 쳤다. 번쩍! 순간, 내 눈앞에 별이 보였다. 김형진도 나를 친 거다.
“이 자식이.”
내가 김형진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김형진도 지지 않고 덤벼들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뒤엉켜서 치고받았다. 그렇잖아도 속이 뒤틀렸었다. 속에 맺힌 대로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최수주, 「동갑내기」, 《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 109-110쪽


이 작품에서 현우에게 불만을 안기는 가정환경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표출되는 다른 많은 동심들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 비슷한 여건에 놓인 모든 어린이가 현우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면의 동기를 살펴봄으로써 한 어린이를 전인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는 동화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현실에서 폭력을 저지른 어린이는 좀처럼 깊이 이해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화 속 현우의 모습은 우리가 동심에 대해 무심코 갖는 갖가지 환상들을 수정할 계기를 제공한다. 동심을 마냥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평소 어린이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신경했던 태도가 누적된 결과일 것이므로, 우리는 동화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어린이 한 명 한 명의 감각을 통해 동심의 실체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동심은 선한 것’이라는 환상은 아직도 강력해서, 악한 마음을 들킨 어린이는 그 가상의 동심 이미지 바깥으로 손쉽게 밀려나고 만다. 그럴수록 세상과 불화하는 동심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애쓰는 동화가 더욱 필요하다. 천사가 아닌 아이들, 교활하고 영악하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은 동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것이야말로 동화가 가장 앞장서서 추구해야 할 본질이 아닐까. 적어도 오늘 나는, 동화의 본질이 불화하는 동심에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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