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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ug 14. 2024

아픈 이의 이름을 하나씩 기억하는 일

《아동문학평론》 2024년 가을호(통권 192호) - 이 계절의 비평

장은서, 「태양은 언제나 여름」

전여울, 「버그 코드: 알로 10」


1. 들어가며


동화작가 케이트 디카밀로는 동화가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되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야 한다’¹고 말했다. 소설가 한강은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이런 질문을 남겼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²

이런 말들은 동화가 세상을 마냥 행복한 곳으로만 묘사할 수 없음을 간명히 드러낸다. 세상은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즐거움과 고통, 희망과 절망이 한날한시에 공존하는 역설적인 곳이다. 행복으로만 가득한 삶은 없고, 오로지 불행하기만 한 삶도 없다. 그러니 현상을 깊이 응시한 글은 자연히 행복과 불행의 특정한 배합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건조한 하나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케이트 디카밀로와 한강이 지적한 역설적 진실은 사실 층위에 머물지 않고 보다 깊고 복잡한 질문에 가닿는다. 행복과 불행을 적당한 비율로 버무려놓는다고 해서 진실한 글이 저절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동화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불가해한 사랑과, 불가해한 증오와, 그것들이 공존하는 불가해한 세상을, 우리는 끝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비율이나 작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하지 않는 질문에 나름나름의 해답을 가까스로 내어놓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어느 독자의 가장 내밀한 시공간에 잊히지 않는 점 하나를 찍는 일이다.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확정적으로 판가름할 수 없는 길 위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그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에 닿고자 고민하는 동화 두 편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야기의 세계에 간간이 찾아오는 진실과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고자 한다.


2. 전쟁과 평화의 역설


장은서의 「태양은 언제나 여름」에서 ‘태양’은 1인칭 주인공의 이름이고, ‘여름’은 개의 이름이다. 이야기는 태양이가 여름이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오늘은 여름이의 생일이에요.”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여름이가 누구냐고 물어보곤 합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여름이는 개예요. 종류는 닥스훈트고요. (……)”
여름이는 여름에 태어나서 이름이 여름입니다. 원래 옆집에 살았는데요. 작년에 집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바람에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옆집이 어쩌다 무너졌냐고요? 바로 전쟁 때문입니다. 우리 마을은 가끔 하늘에서 미사일이 쏟아지고, 거대한 탱크가 길을 막곤 하거든요. 한바탕 요란한 하루가 지나가면 꼭 한 집 정도는 무너져 있죠.     

장은서, 「태양은 언제나 여름」,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73쪽


이야기는 간결한 소개말을 통해 일반명사 ‘태양’과 ‘여름’을 각각 고유명사로 바꾸어낸 뒤, 곧바로 그 뒤의 배경으로 초점을 옮긴다. 평화로운 휴양지를 연상케 하는 제목의 뉘앙스와는 반대로, 이야기 속 세계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은유나 상징으로서가 아닌, 가장 일차원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전쟁 속에 어린 태양이와 여름이가 있다.

여름이가 살던 옆집을 무너뜨린 것은 전쟁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적의 포탄이나 미사일이 옆집에 떨어졌을 것이고, 이는 태양이와 여름이가 매일 생사가 엇갈리는 사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전쟁은 정작 그것을 일으킨 원인과 아무 관련도, 책임도 없는 이들을 찾아와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이 이야기에서 전쟁을 야기한 현실적 맥락이 소거되어 있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란 단어와 가장 먼 삶을 살아왔을 것이 분명한 태양이와 여름이가 전쟁의 폐허 한가운데 뚝 떨어져 있는 이 아이러니는, 곧 이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의 정수가 된다.


운이 좋게도 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났습니다. 공습경보가 내려졌거든요.
(……)
“여름아, 생일 축하해! 갖고 싶은 건 없어?”
“멍!”
(……)
아하, 여름이는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직접 선물을 고를 작정인가 봅니다. 선생님이 오늘은 절대 집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지요. 생일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장은서, 「태양은 언제나 여름」,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73-74쪽


태양이와 여름이는 함께 여름이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이런 순간에 동화는 특유의 반짝임으로 제 존재의 가치를 알린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절망적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묵묵히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는 작고 힘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 한껏 빛을 발한다. 마른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피어난 여린 들꽃처럼, 그렇게 살아있는 독자의 시선을 붙드는 힘이 동화에는 있다.

여름이의 생일 선물을 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들른 곳은 일주일에 한 번씩 큰 장이 서는 광장이다. 하지만 장은 열리지 않았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여름이는 한산한 광장을 돌아다니다 시계탑 앞에 멈춰 서서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 아주머니가 땅속 구덩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친다.


“으악! 살려 주세요!”
(……)
“오늘은 파란 조끼 시장이 열리지 않나요?”
“파란 조끼 시장?”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먹을 것과 옷을 나눠 주는 시장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서 열리잖아요.”
“너는 뉴스도 안 보니? 곧 미사일이 마구 쏟아질 거야. 다들 지하에 숨었단다. 이런 상황에 시장이 열리겠니?”     

장은서, 「태양은 언제나 여름」,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75쪽


아주머니가 숨어 있던 곳은 아마 임시로 파놓은 방공호일 텐데, 일차적으로 의아한 것은 이 세계의 어른들이 애초에 태양이와 여름이를 방공호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의 공습으로 집들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어린이와 개를 방치한 채 어른들만 대피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 속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곳은 어린이가 어른으로부터 마땅한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세계이다.

태양이와 여름이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놀이터다. 여름이가 좋아하는 땅 파기라도 실컷 하게 해주려고 찾아간 놀이터는 먼저 온 군인들로 소란하다. 군인들은 자루에 모래를 퍼담고 있다. 무슨 영문인지 묻는 태양이에게 군인은 ‘시민을 지키기 위해 모래를 모아 방벽을 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답한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과 명령에 따르는 것은 물론 군인의 본분이겠지만, 어린이를 위해 조성된 놀이터의 모래조차 어른들의 전쟁 자원으로 동원되는 풍경은 못내 씁쓸하고 쓸쓸하다. 이 세계에서는 쓸모 있는 어떤 것도 어린이의 몫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태양이와 여름이의 다른 어른 가족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삭막한 풍경에 비추어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옆집에 살았을 여름이의 원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태양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과 놀이터를 떠도는 동안 태양이의 부모는 뭘 하고 있었을까. 작중에는 이들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데, 이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독자로 하여금 전쟁의 속성을 재차 고민하게 만든다. 요컨대 전쟁이란, 어떤 존재를 그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박탈하는 행위이다.

이토록 잔혹한 세계에서 태양이와 여름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터널이다. 비어 있던 광장과는 대조적으로, 터널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서 있다. 이들이 넓고 밝은 광장 대신 좁고 어두운 터널에 모여 있는 건 식사 배급을 받기 위해서다. 터널 속 암울한 이미지는 곧 전쟁에 관한 메시지로 일관되게 이어진다. 태양이는 파란 조끼를 입은 삼촌에게 카레를 한 그릇 가득 받아먹지만 그 소박한 식사마저도 여름이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전쟁 중인 나라에 개를 위한 식량은 없다. 전쟁은 언제나 가장 약한 이들을 가장 열악한 곳으로 내몬다.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여름이는 동굴 같은 터널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고, 태양이는 그 뒤를 따른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요?
여름이는 여전히 바닥에 코를 박고 있고, 저는 슬슬 다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고 싶었는데, 마침 터널 저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자 저도 모르게 힘이 마구 솟아올랐습니다.     

장은서, 「태양은 언제나 여름」,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80쪽


‘터널 끝 한 줄기 빛’이라는 익숙한 클리셰를 거쳐 이야기는 결말로 향한다. 희미한 빛을 따라 터널 밖으로 나온 태양이와 여름이 앞에는 뜻밖에도 작고 허름한 비행기 한 대가 놓여 있다. 둘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운전석에 앉는다. 태양이가 핸들을 쥐자 곧 하늘에서 비행기 엔진 소리가 거대하게 울려 퍼진다.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단정 지을 수 없다. 결말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양이와 여름이는 주인 없는 비행기를 타고 평화로운 곳으로 훨훨 날아갈 수도 있지만,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엔진 소리가 폭탄을 가득 실은 적기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보자. 이것은 초현실적 서사 장치를 통해 어린이를 평화의 지대로 데려가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전쟁터에 남겨진 약자의 불행을 끝까지 응시하는 이야기인가.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둠으로써 동화는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역설적 진실을 인상 깊게 드러낸다.


3.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기


이제 장소를 옮겨 논의를 이어가 보자. 전여울의 「버그 코드: 알로 10」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유티드로’라는 게임 속 사이버 공간이다. 이야기는 게임 속 몬스터 ‘알로’가 주인공 ‘지수’의 영지에 침입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저기,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 달라니. 그게 침입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잠시 화염 지팡이를 내려 두고 침입자를 살펴보았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침입자의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침입자의 외형이 알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알로는 전형적인 고블린 형태의 하급 몬스터로, 조그만 초록색 몸에 뾰족한 귀와 빨간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전여울, 「버그 코드: 알로 10」,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83쪽


게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몬스터가 플레이어의 사적 영지를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처음에 지수는 침입자의 정체를 의심한다. 다른 플레이어가 가짜 몬스터로 위장해 쳐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알로가 진짜 몬스터이며 게임 세계에 발생한 어떤 오류로 인해 지수의 영지에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소라면 초보 유저들의 사냥감에 불과한 알로 정도는 가볍게 해치워 버렸겠지만, 지수는 그러지 않는다. 정해진 패턴에서 벗어난 알로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만의 고유한 인격이 존재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지수의 영지에 찾아온 알로는 더 이상 게임 속 데이터 조각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한 차례 인격적 교감이 오간 이후 알로는 ‘버그’란 이름을 갖게 된다. 버그는 일반적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한 오류를 일컫는 용어인데, 자기 존재 자체가 게임 속 오류라는 걸 모르는 알로가 버그를 자신의 이름으로 오해한 것이다.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아주 드물지만. 언제 어떻게든 나타날 수 있지. 그걸 흔히 버그라고 불러.”
“버그? 그럼, 제가 버그라는 말씀일까요?”
“뭐, 굳이 말하면 그렇지.”
“알로끼리는 서로를 알로라고만 불러서 몰랐는데 제게도 저만의 이름이라는 게 있었군요!”     

전여울, 「버그 코드: 알로 10」,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86-87쪽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이름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건 그가 이야기 속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는 표지이며, 독립된 개별자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호명할 때 그가 속한 무리의 이름을 빌리는 것과 그만의 고유한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 개체에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존재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대상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대체 불가능한 관계가 성립함을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지수가 알로를 버그로 호명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수많은 하급 몬스터에 불과한 알로가 ‘버그’란 이름을 갖는 순간, 둘 사이엔 플레이어-몬스터의 형식적 관계를 뛰어넘는 개별적 관계가 성립된다. 지수가 버그에게 자신의 사적 영지 출입을 허락하는 장면은 이렇듯 질적으로 바뀐 관계에 대한 승인 절차로 이해된다.


“버그인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일단은 나도 뭘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답을 생각할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그동안은 여기 있는 걸 허락해 줄게.”
“이렇게 멋진 곳에서 머무는 걸 허락한다고요?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내 영지에는 버그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 하는 알로가 머물게 되었다.     

전여울, 「버그 코드: 알로 10」,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87쪽


이름을 매개로 한 깊고 내밀한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대에 대한 공감과 이입을 요한다. 지수는 게임 속 알로들이 공격받는 상황에 이전처럼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없다. 버그가 슬퍼하기 때문이다. 버그가 수많은 알로 중 하나에 불과했다면 보이지 않았을 세계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버그는 지수의 영지에서 행복하게 지내다가도 바깥에서 자기 종족이 죽고 다치는 상황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결국 지수는 버그와 버그의 친구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은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현실에 대한 맞춤한 은유이다. 우리가 타인의 전쟁에 그럭저럭 무던하게 반응할 수 있는 건, 어쩌면 그 세계에서 파괴되고 손상되는 것들을 데이터 층위에서 사고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규격화된 전쟁은, 그 안에서 죽고 다친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불행의 원인을 찾아 해결할 길이 요원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준비됐지?”
내가 묻자 버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침없는 속도로 늪지대에 뛰어들었다. 늪지대에는 버그와 똑같이 생긴 알로 여러 마리가 있었고 그 옆에는 어김없이 알로들을 해치우러 온 유저들이 있었다. 나는 영지에서 돈 될 만한 것들을 다 팔고 얻은 골드로 산 혼돈의 지팡이를 마구 휘둘렀다.
(……)
그렇다고 해서 버그와 다른 알로들이 영원히 무사할 순 없겠지만,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해냈다는 생각에 기뻤다.
“잘 있어, 내 행운의 버그.”     

전여울, 「버그 코드: 알로 10」, 《창비어린이》 2024년 여름호, 95-96쪽


그러나 생각해보자. 전쟁을 수행하는 병정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공격할 상대의 이름이 아니라 피아를 식별하는 기계적 요령이다. 상대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게 하는 근원적 동력은 바로 이 철저한 무지와 무관심에서 온다. 적의 이름을 묻는 일은 금기시된다. 그것은 그가 지나온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이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전쟁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격을 하려면 상대를 몰라야 한다.

그러니 전쟁의 종류를 불문하고, 그것을 반대하는 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의 이름을 묻고 기억하는 일이다. 전쟁에서 운 좋게 한 발 비껴 나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물리적 현실부터 사이버 공간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공격과 폭력에 뿌리째 흔들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묻고 안위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조금씩이나마 평화에 다가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영원히 무사할 순 없겠지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세계에서 작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야 한다.


4. 아픈 이의 이름을 하나씩 기억하는 일


아름다움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세계의 모순을 끌어안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한다. 태양이와 여름이의 이야기, 지수와 버그의 이야기는 그 사실을 얼버무리거나 미화하지 않고 담담히 드러낸다. 태양이와 여름이처럼 믿음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자고, 지수와 버그처럼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연대하자고 말한다. 진실을 감당하는 노하우는 그렇게 이야기를 타고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쉼 없이 전해진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세계가 겹치고 뭉쳐 비 온 뒤의 땅처럼 단단해지는 상상을 해본다. 세계의 잔인함에 쉬이 좌절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아픈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묻고 먼 곳에 안부를 전하며 진득하게 살아가는 날을 그려본다. 어쩌면 그것이 동화처럼 순진한 일로 여겨지는 세상이라, 오늘도 나는 동화를 읽고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글을 읽고 쓰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실제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가 전쟁터에 외로이 고립되지 않도록, 타자가 영원한 타자로 남지 않도록, 아픈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으로, 잘 알려진 시 한 편을 새삼스레 다시 꺼내어 새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¹ "Why Children’s Books Should Be a Little Sad", TIME, 2018.1.12.

² "소설가 한강이 말하는 5·18의 기억과 ‘사자왕 형제의 모험’", 경향신문, 2017.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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