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 위즈덤하우스, 2023
* 쪽수: 252쪽
위즈덤하우스에서 기획한 청소년문학 시리즈 '텍스트T'의 여섯 번째 작품, 『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를 보았습니다. 흔히 한국식 어반 판타지라고 부르는 장르의 디테일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풍부하게 삽입된 작품입니다. 한국적인 전통과 신화적인 모티프가 미야자키 하야오풍으로 펼쳐지는데, 이게 아주 독특한 인상을 줍니다. 이런 방식의 연출을 누군가는 정신없어할 테고, 누군가는 신선하다고 하겠죠.
열다섯 살 소녀 '김모라'는 자신에게 걸린 '반사의 주문'을 해제하기 위해 남대문시장에 가게 됩니다. 반사의 주문을 걸어놓은 사람은 모라의 엄마 '현아'고요. 반사의 주문은 누군가 악의를 품고 모라를 공격했을 때 그 공격이 그대로 반사되어 행위자에게 돌아가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러니까 이 주문은 사실 모라를 지켜주는 강력한 실드인 셈이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갖고 싶은 능력이겠죠. 모라는 왜 이런 특별한 능력을 없애려고 하는 걸까요. 그건 단순하게 말하면 평범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주문을 건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반사의 주문은 모녀간 갈등을 장르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장치라고 보면 되겠지요.
작중 세계관은 시작부터 현실과 판타지로 뚜렷이 나뉩니다.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이야기 속 세계는 모라가 속한 현실, 그리고 엄마가 속한 시장으로 양분되지요. 이런 세계관 설정은 모녀가 각기 경험하는 세계의 거리가 현실과 판타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히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딸이 엄마의 세계에 건너갔다 오는 건, 어쩌면 판타지 장르로 귀결될 극적이고 환상적인 경험일 수 있다는 거죠.
도입부에 모라는 학교에서 겪은 이상한 일에 대해 아빠와 대화를 나눕니다. 계단에서 모라를 밀었다가 되려 자기가 넘어져서 다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아빠는 모라에게 엄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제야 모라는 이 모든 일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걸어놓은 주문 때문에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되지요. 반사의 주문은 모라와 상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상태에서만 발동하기 때문에 모라는 지금껏 학교에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아예 친구를 깊게 사귀지 않는 방식으로 이어져왔지요. 주문의 출처를 알게 된 모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엄마가 있다는 남대문시장으로 향합니다.
남대문시장은 이 이야기가 펼쳐 보이는 판타지의 주무대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 남대문시장이 맞긴 한데, 이 세계를 구축하는 법칙과 디테일은 모라가 속한 현실세계와 완전히 별도로 존재합니다. 여긴 아직도 이씨 왕조의 지배 아래 있고, 그림 속 동물이 말을 하고, 속이 빈 인간 껍데기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세계입니다. 당연히 서사의 무게중심도 이곳 남대문시장에 있지요. 모라가 시장에 찾아온 뒤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여기선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모라의 시장 탐험기, 또는 모험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엄마와의 만남은 모험의 최종 목적지가 되겠고요.
이 작품이 묘사하는 시장의 풍경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합니다. 엄마가 있는 곳은 시장의 물품보관소인데, 거기까지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정이 만만치 않죠. 게다가 시장 사람들은 물품보관소 이야기만 나오면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라는 도움을 받기보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때그때 돌파구를 마련해 나갑니다. 조건 없이 타인을 돕는 행위가 자기도 모르게 주인공을 목적지로 인도하는 것이죠. 의미 있는 전개라고 생각했어요.
모라가 마주치는 인물들의 면면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이 시장에는 모종의 정치적인 이유로 죽은 자 행세를 하고 있는 선왕이 있고, 그의 호위무사도 있습니다. 모라는 별생각 없이 이들을 도왔다가 시장의 규율을 꽉 잡고 있는 상인회 회장대리 '유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다 그릇가게 '윤 사장'과 꽃시장 '화주'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벗어나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되지요. 이처럼 이야기는 모라가 엄마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의 반복으로 연출함으로써 긴장감의 고삐를 적절히 잡아당겨 줍니다.
마침내 물품보관소에 들어간 모라는 그곳에서 엄마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처음 등장하는 엄마의 모습은 꽤나 이질적입니다. 모라가 아기일 때 반사의 주문을 걸어 시장 밖으로 내보낸 엄마는 주문을 해제하러 왔다는 딸을 보고도 그저 덤덤히 물을 끓여 차를 마십니다. 알고 보니 거기엔 또 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모라에게 모라의 사연이 있듯, 현아에게도 현아만의 사정이 있었던 거죠. 대화를 통해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모라는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반사의 주문을 없애지도 못했고, 어렵사리 재회한 엄마와도 다시 헤어져야 하지만, 이런 유의 소설에서 그런 사실들은 오히려 주인공의 성장을 암시하는 강력한 표지로 기능하게 됩니다. 나아가 저는 이것이 지금 시대의 모녀관계를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란 많은 경우 떼려야 뗄 수 없는 주문 같은 끈으로 엮여 있는 것이겠지만, 결국 이들도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 운명일 테니까요. 함께 성장하고 지켜보는 것만이 모두에게 최선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