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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08. 2024

아픔을 똑바로 응시하는 법

문경민, 『나는 복어』, 문학동네, 2024

* 쪽수: 191쪽



문경민의 청소년 장편소설 『나는 복어』를 읽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훌훌』(2022)을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엄마의 죽음'이란 무거운 소재를 중심축으로 삼아 도입부터 결말까지의 서사를 나선형으로 풀어간다는 점,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짧고 굵은 멘트로 작품의 톤을 인상 깊게 각인시키는 점 등이 특히 그렇지요. 힘 있고 강렬한 이야기입니다.


1인칭 주인공 '김두현'은 자현기계공고 2학년입니다. 두현의 엄마는 두현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청산가리 음독으로 자살했고, 아빠는 감옥에 있습니다. 당시 엄마의 자살 사건은 기사화되어 인터넷에 실렸고요. 두현 역시 해당 기사의 내용으로 엄마의 죽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정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뒤에서 두현을 '청산가리'라고 부르며 수군거립니다.


두현 곁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 '준수'와 '재경'이 있습니다. 준수는 주인공에게 힘을 보태주는 전형적인 조력자 캐릭터이고, 재경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어느 지점에선 작가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실어 나르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이 두 친구는 두현을 가운데 두고 초반부터 썸을 타기 시작하는데, 이야기 전체로 봤을 때 둘의 로맨스가 그렇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덕에 세 인물 모두 한결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지요. 삼각관계 같은 건 없습니다.


재경에게도 가족과 관련된 아픔이 있습니다. 재경의 오빠 '재석'은 자현기계공고 학생회장까지 했을 정도로 유능하고 열정적인 학생이었는데, '귀금 코리아'라는 금형 공장에 현장 실습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죽지는 않았지만 가슴뼈와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죠. 기능올림픽까지 출전할 정도로 기술이 탁월했던 재석은 사고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기계 앞에 서지도 못하게 됐습니다. 그런 오빠를 보고 재경은 자현고에서 자현기계공고로 전학을 온 뒤 귀금 코리아 '장귀녀' 사장의 사과를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장귀녀 사장은 오래전에 자현기계공고를 졸업한 선배이기도 하거든요.


이런 이야기에서는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인물이 만나 공명하는 과정이 특히 중요하지요. 그런 점에서 두현과 재경의 연대는 이 작품이 추구하는 메시지의 핵심 동력이 됩니다. 요컨대 엄마의 죽음이 '청산가리'와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뚫고 비로소 두현의 내면에 닿는 시점은, 재경이 장귀녀 사장에게 이렇게 외치는 걸 두현이 본 이후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노동자를 죽을 곳으로 몰아넣는 거야."
(……)
"당신 같은 사람들이 용광로에 사람을 떨어뜨리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들이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사람이 끼여 죽게 만드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들이 콜센터 직원을 자살에 내몰리도록 내버려두고, 현장 실습생이 배에 붙은 따개비를 따다가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드는 거야. (……)"
(……)
"돈이 최고라고 떠드는 이 개 같은 세상이 당신 편이어서 당신은 자기 말이 옳다고 믿는 거야!"

107-108쪽


사실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 장귀녀 사장과 귀금 코리아를 상대하는 재경의 태도는 자주 서툴고 투박했습니다. 전 그런 투박함이 결국 이 말들을 하기 위해 치밀하게 깔아 둔 밑작업으로 느껴졌어요. 그만큼 강한 폭발력을 갖는 말들이고, 이후의 이야기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동력을 내포한 말들이지요. 장귀녀 사장과 재경의 담판을 목격한 두현은 제 엄마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직시하기 위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렀던 발걸음을 옮깁니다.


두현이 자신의 아픔을 직면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결말로 접어듭니다. 그러면서 그간 벌어졌던 사건들이 개연성 있게 매듭지어 지지요. 말끔하게 해소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인물들은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 앞으로 나아갑니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죠.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두현은 9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이전까지는 엄마의 죽음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원망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건 두현이 아픈 진실을 직면하는 방법 한 가지를 경험으로 배웠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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