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은 종말』, 퍼플레인, 2024
퍼플레인 출판사에서 곧 출간될 정보라 작가의 환상문학 단편선 『작은 종말』의 가제본을 보내 주셨습니다. 총 열 개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인데 가제본에는 그중 앞의 세 작품만 실려 있었습니다. 제목은 순서대로 「지향」, 「무르무란」, 「개벽」이고요. 모두 지난해 서로 다른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작품입니다. 이 글에서는 첫 작품 「지향」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무엇보다도 오늘날 인간성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반지성주의에 대해 언어적으로 매우 정치한 담론을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성의 없는 악의로 중무장한 사람들에게 이렇게나 우아한 반론이 가당키나 한가 싶다가도, 결국 세상은 우아함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언어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행위를 거쳐 진보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숙연해지게 됩니다.
「지향」은 큐큐 출판사에서 기획한 퀴어문학 시리즈 '큐큐퀴어단편선'의 여섯 번째 책 『서로의 계절에 잠시』에 수록되었던 작품입니다. 『작은 종말』을 열었을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작품이 「지향」이라는 건 사뭇 의미심장합니다. 전 「지향」을 이 책에 담긴 한 세계 전체의 지향점으로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저에게 일종의 이정표 노릇을 해준 것이죠. 다만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에 어떤 명시적인 목적지나 이상향 같은 게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는 그저 화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죠.
나아간다, 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세 가지 인식이 선행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지나온 길에 대한 인식이고, 둘째는 내가 선 자리에 대한 인식이며, 셋째는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향」은 ―제목이 지닌 뉘앙스 그대로―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어딘가로 나아가게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 '나아감'은 퀴어문화축제의 '평등행진'으로 가시화됩니다. 행진이라고 하면 흔히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균질한 집체의 행렬을 상상하곤 하지만, 「지향」에서 독자가 실제로 만나게 되는 이들은 서로 다른 개체의 조화로운 스펙트럼으로서 존재합니다. 평등행진은 그들을 둘러싼 성의 없고 악의적인 경계를 해체하는 과정으로서 정교하게 의미를 획득하지요.
그러니 오로지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여 외쳐대는 이들은 실은 자기네가 적으로 규정한 대상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예컨대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은 팬섹슈얼리티나 에이섹슈얼리티를 모르고, 그래서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색색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당연히 모르고, 그에 앞서 애초에 자기네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또 뭘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몰지각하고 반지성적이죠. 「지향」은 이런 노골적인 반지성주의에 대한 가장 지적인 반론입니다.
실존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페미니즘 혹은 젠더퀴어라는 라벨로 뭉텅뭉텅 범주화하는 태도는 종종 그 이야기에 대해 약간의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거대한 인식의 장벽을 세우도록 압박합니다. 그런 점에서 '퀴어문학'이라는 명명은 그 자체로 '퀴어'한 면이 있어요. 경계를 해체하기 위한 움직임을 규정함으로써 세워지는 경계라니, 에셔의 작품 세계 안으로 빨려 들어간 듯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이런 이야기는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 전 이 작품이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그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틀리지 않는 선에서 대충 만족하고 넘어가기엔 이 소설은 너무나도 명확한 언어로 당위를 서술하고 있거든요. 결국 어떤 정체성을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둬두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계를 해체하고, 당사자가 스스로 구축한 경계를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이 작품의 '지향'은, 오늘날 진보가 가장 치열하게 투쟁해야 할 가치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