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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16. 2024

과거에 붙들린 상상 속 미래

신수나, 『우주 메아리』, 이지북, 2023

* 쪽수: 168쪽



신수나의 장편 동화 『우주 메아리』의 배경은 '우주섬'이라는 주거용 위성입니다. 지구인들이 우주섬을 쏘아 올린 이유는 오염된 지구에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이런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오염되기 전 옛 지구를 그리워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에선 주인공 '한다노'의 아빠가 그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대변합니다. 아빠는 옛 지구처럼 인간이 살 수 있는 푸른 별을 찾아내겠다며 '메아리 호'를 타고 우주로 나갔고, 다노는 우주섬에 남아 에너지 공장에서 쓰레기를 분류하며 생계를 이어갑니다.


이야기는 다노가 우주 탐사선의 실종 소식을 접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노는 실종된 탐사선이 아빠가 타고 있는 메아리 호일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습니다.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고아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다노의 아빠가 무려 탐사선 선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싫어할 게 뻔하니까요. 다노는 아빠가 돌아오기만 하면 '이따위 쓰레기 같은 일'은 당장 때려치우겠다고 속으로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이건 좀 이상한 생각이죠. 다노에겐 엄마도 있고 여동생도 있는데, 그럼에도 다노가 소년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아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빠도 떠나기 전 다노에게 '엄마와 다미를 부탁한다'라는 다분히 20세기 미국 영화스러운 말을 하고요. 이런 생각은 작중 세계관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요. 하지만 어렵사리 지구를 탈출해 근근이 살아가는 소수의 인간들이 '남성 중심 정상 가족'이란 빛바랜 아이디어를 고수할 여력이 있을까요.


이야기는 다노와 아빠 사이에 흐르는 강한 의지와 감정의 자장 안에서 흘러가지만, 정작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별림'이라는 이름의 유령입니다. 도입부터 결말까지 다노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인물이죠. 별림의 정체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다노의 삼촌으로 암시됩니다. 오염된 지구에서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리다 죽은 뒤 인공위성에 실려 우주로 날려 보내진 삼촌이, 모종의 이유로 다시 나타나 마치 게임 퀘스트를 안내하는 가이드처럼 다노를 돕는 겁니다. 흥미로운 설정이었어요.


중반부에 '지하실의 괴짜 수리공'이란 클리셰가 능숙하게 삽입되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다만 휠체어에 탄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던 그가 악당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 두 다리로 서는 장면은 보기에 따라 장애를 일회성 소품으로 사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이상한 건 다노의 엄마와 여동생입니다. 이들은 악당에게 납치되었다가 다노의 활약으로 구출됩니다. 그러곤 다노와 아빠가 힘을 합쳐 모든 위기를 해결한 뒤에 선물처럼 다시 나타나지요. 『우주 메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남성들의 세계이고 다노의 엄마와 여동생은 그 세계 위에 얹힌 장식처럼 보여요. 여성이 인질이나 보상 또는 지켜야 할 타인으로서만 존재하는 세계는 이야기의 관점에서 그리 매력적인 곳은 아닐 겁니다. 이 작품이 미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마치 한 세기 전 과거의 관습에 매인 듯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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