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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개츠비

로이스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3장 - 「마르크스주의 비평」

by 달리

『비평이론의 모든 것』을 한 달에 한 챕터씩 읽고 리뷰하는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숙제로 쓴 글 올려봅니다. 이번에 읽은 챕터는 3장 「마르크스주의 비평」입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인간이 평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은 직관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모든 명제가 그렇듯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따져 묻기 시작하면 상황은 사뭇 달라진다. 예컨대 역사 이전이라면 어떨까. 기록을 남기지 않은 어떤 작고 폐쇄적인 인간 공동체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마르크스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했을 가능성을 마냥 부정할 수 있을까. 기록으로서의 역사에서 배제되었다고 해서 미지의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것은 타당한 일일까.


보다 미묘한 문제는 우리가 평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하는가에 달려있다. 평등한 상태라는 것에 대해 인간이 갖는 주관적 감각은 그리 믿을 만한 게 못된다. 누군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인간 개체가 서로 다르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근원적 불평등이 야기된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건 상반된 듯 보이는 이 두 주장이 실제로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은 맨 처음의 명제, 곧 '인류 역사상 모든 인간이 평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에 제 나름의 해석을 붙여 동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상 언어에서 평등이란 그만큼 허술한 개념이다. 이 허술함 위에서는, 처음의 명제는 물론 그것의 역도 충분히 성립 가능하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헌법의 이상과 '모든 인간은 돈 앞에 평등하다'라는 자본주의의 신화는 어떤 사람들에겐 실질적으로 참인 명제일 수 있다.


어쨌거나 우리가 뭐라고 떠들든 인간 개체는 다 다르게 태어나며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자원을 소유하고 경험한다. 이것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지구에 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불평등이다. 내가 아는 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현시점에서 가장 과격한 진보주의자라도 인간 개체의 차이를 지우는 인류 개량 프로젝트를 지금 당장 시행해야 한다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지는 않는다. 개체 간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불평등은 인간 삶의 본질이다.


불평등을 해소하자거나 완화하자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이 본질 바깥의 것들을 겨냥한다. 본질적 불평등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신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본질적 불평등, 부조리하고 불의하고 부당하고 기이하고 나쁜, 그밖에 온갖 부정적 수사를 모조리 갖다 붙여도 무리가 없을 듯한 그런 차원의 불평등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흔하게 듣고 쉽게 동의한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비평이 주요하게 다루는 것 역시 그러한 비본질적 불평등으로서의 자본주의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계급구조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삶에서 개선되어야 할 모든 불평등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는 명실상부 현시대를 제패한 이데올로기다. 아쉬운 것은 자본주의가 모순으로 가득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이 그들의 노력과 재능과 기타 모든 좋은 자질에 대한 합리적 보상체계로서 작동한다고 믿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부조리를 은폐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의 값은 그가 소유한 자본의 양으로 치환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인간의 귀천은 그가 소유한 자본의 양과는 무관하다. 자본가의 천박함과 노동자의 천박함은 실은 같은 성질의 것이고, 자본가의 고매함과 노동자의 고매함 역시 그렇다. 물론 현실에서, 그리고 현실을 반영한 문학에서 이런 형식논리적 단순함은 좀처럼 먹혀들지 않는다. 자본가의 천박함은 가려지고, 노동자의 천박함은 과장된다. 이 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이 책의 비판은 타당하다. 개츠비의 천박함은 낭만적으로 포장되고, 조지의 천박함은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간파하고 이를 의식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쓰인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작품을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해서만 독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피츠제럴드에게 개츠비와 톰과 데이지와 조던은 그저 그 시대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떠올린 상상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인물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제 주위에 넘쳐나는 온갖 사치재를 단지 자신을 치장하는 깃털 정도로 소비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그 시절 사교계 특유의 분위기는 물론 동시대 걸출한 문학작품 사이에 흐르던 냉소적 기류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의 사교계는 무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쩔 수 없이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었고, 그건 언제나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였다.


그러니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돈 많은 인물들이 때때로 몇 가지 단순한 규범에 따라 시시하게 움직이는 건, 작가가 그들을 집중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시시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당대 민중은 물론 주류 문학가들이 이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 숱하게 묘사된 갑부들의 나태함과 천박함은 오히려 심상하다.


반대로 실패한 아메리칸드림을 끝내 순애보로 낭만화하는 이 작품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 개츠비의 죽음은 화려함으로 위장한 초라함이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이자 이상향으로 느껴진다. 개츠비는 데이지 앞에서 산산조각 난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인물이다. 초라한 알맹이로 사느니 껍데기와 함께 장렬하게 스러지는 것이 개츠비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결말이다. 이전에 묘사된, 위태로운 졸부로서의 면모는 결국 개츠비를 자본가로 등장해 자본가로 퇴장하게 한다. 어쩌면 개츠비는 자본주의의 순교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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