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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Dec 30. 2024

#07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이야기에는 각각에 맞는 옷이 있다

* 본 작품은 2021년 7월 31일 출간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포춘 쿠키)에 실린 9편의 에세이 중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부분을 출판사 허가하에 연재한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번호와 밑줄로 표기한 후, - 구분자를 이용해 출판사 버전을 간소화하여 실었습니다. 




이야기의 형태에는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출판소설, 출판만화,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연기가 뿌리는 같아도 연극, 영화,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 따라 기법이 다르듯 이야기를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분야만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거장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연상호 감독같이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을 오가는 이야기꾼도 있다. 나는 분야마다 특성을 익혀두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조악한 예문이지만 아래와 같은 장면이 있다고 치자. 


밥을 한술 뜨다 말고 그는 헤어진 그녀가 생각났다. 서걱서걱. 입 안 가득 진득한 쌀알을 씹어도 서걱서걱. 거칠고 쓴맛이 났다. 그녀와 그도 처음부터 거칠고 쓴맛이었던가. 한때는 그 어떤 것도 달콤하고 뜨겁고 아찔한 맛이었는데. 언제부터 변한 걸까? 


출판소설이나 웹소설에는 이와 같은 묘사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웹툰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나타내는 해설로 바꾸어야 한다. 

 

S #. 남자의 집. 식탁 (밤, 은은한 조명)

자동적으로 밥술을 뜨는 남자. 마치 거친 모래알을 씹듯 무표정하다. ‘서걱서걱’ 다시 한술 뜨려다 말고 시선이 식탁 건너편 자리에 머문다. 미간이 움직인다. 


(13) 인서트insert) 밥 먹으며 장난을 치다 사레들려 물을 마시는 여자. 사레들려 눈물까지 찔끔한 눈가는 촉촉하고 볼은 발그레하다. 

그는 여전히 ‘서걱서걱’ 밥을 먹는다. 


웹툰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드라마와 영화보다 작업 인원이 소규모라 그림작가와 합의하여 정할 수 있다. 나는 보통 영화 시나리오 쓰듯 쓴다. 그런데 웹툰이 시각화될 때 그림표현의 기법 때문에 웹툰과 영화 시나리오는 세부적 차이가 있다.

일단 웹툰에는 소리가 없다. 그래서 영상 매체에서는 소리의 질감을 다르게 해야 할 인물 내면의 소리, 전화 통화 외 14) 보이스오버voice over를 웹툰에서는 보통 섬세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크게 묶은 ‘(E)’를 포함해 내레이션, 효과음, 웅성거림이나 중얼거림 같은 배경음 구분은 해 둔다. 그러면 그림작가는 각 구분을 보고 말풍선, 글씨체 등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다.


내가 웹툰 시나리오를 쓰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플래시백의 조율이었다. 15) 웹툰 한 화의 컷 수는 보통 60~100컷. 그림 수가 많아 보여도 초당 24 프레임인 영화만큼 많은 스토리를 전개하기는 어렵다. 영화만큼 상세하게 프레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서 컷과 컷 사이에 독자가 상상해야 하는 영역이 생긴다.

웹툰에서 플래시백이나 인서트는 검은 바탕으로 전개한다. 웹툰을 스크롤하다가 검은 바탕이 나오면 독자는 주춤하게 된다. 이런 플래시백이나 인서트가 한 화에 두 번 이상 나오면 독자의 이해가 엉킨다. 인기가 상당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은 시리즈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들이 나온다. 그중 한 남자와 주인공은 부부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그 행운의 남자는 그때 그 시절의 누구였을까 하고 화두를 던져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와 유사한 플롯들은 플래시백을 자주 쓴다.   내가 썼던 웹툰 〈은퇴한 아이돌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아이돌들이 운영하는 떡볶이집을 먼저 보여주고 그런 떡볶이집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이야기하려 했다. 전성기가 지난 아이돌들의 사연을 보여주려면 그들이 떡볶이집을 찾아온 시점보다 더 과거로 가야 했다. 자칫 한 화에 플래시백이 두 번 이상 생길 뻔한 적이 많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배워 웹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생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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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떤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된 장면. 줄거리의 전개를 방해하고 너무 설명적으로 될 수 있어 적게 쓰는 것이 좋다.

14)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화자의 목소리.

15) 처음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5화까지는 컷 수가 많은 편이고 보통 5화까지는 세이브 한 채로 플랫폼 미팅을 한다. 따라서 5화까지는 프리 프로덕션을 할 시간이 좀 있다. 연재를 지속할수록 작업량은 많은데 준비 시간이 짧아 컷 수가 약간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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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앞의 식탁 장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쓸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아니요’가 답이다. 웹툰과 영화, 드라마는 작업 환경이 다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 외 조명, 음악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가 있어 작업 인원이 무수히 늘어난다. 등장인물의 내면 묘사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할 사람과 기술이 너무 많다. 드라마 한 화에 1시간, 영화 한 편에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는 전개를 늘어지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한 위와 같은 묘사는 돌 씹는 듯한 표정 1컷,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는 눈길 1컷으로 축약하고 인서트는 독립된 신으로 다른 파트에서 전개하는 것이 낫다. 아니면 아예 삭제되거나 편집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 분야별로 강점이 되는 혹은 배울 만한 이야기 전개법도 있을까? 아직 경험의 폭이 넓지 않아 배울 것이 더 많지만,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점이 몇 가지 있긴 하다. 등장인물의 내면 혹은 세계관을 길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출판소설이 좋다. 16) 웹소설은 역시나 줄글이지만 모바일을 기반으로 하는 카카오페이지 판형이 더 많이 뜨고 있다. 또 웹소설은 기기에서 보는 경우가 많아 묘사보다는 대사가 더 많은 것이 선호된다. 줄글을 쓰는 데도 이렇게 기술적 차이가 있지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작업이다. 누구의 개입도 원하지 않고 원 없이 쓰고 싶다면 단연 소설이 최적이다.

17) 웹툰은 엔딩 마법을 배우기에 좋다. 웹툰 한 화를 읽는 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은 3분인데, 화마다 다음 화를 열어보고 싶게끔 엔드점을 잡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매 화의 끝에 흥미를 돋우고 다음 화 초입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준다. 약간 숨을 돌리고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여 다시 또 흥미를 끌어올린 후, 해당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 또는 클라이맥스 직전에 끝내야 한다.

웹툰은 이야기 전개 방식을 쪼개는 연습을 하기도 좋다. 다음 화를 보게끔 유도하는 데는 엔드점이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하지만, 각 화에 임팩트 있는 사건을 열거나 전개하거나 닫거나 하는 이야기의 흐름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퀀스, 신으로 나눌 뿐 아니라 신 안에서도 더 작은 이야기 단위 안에 재미를 분배할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상천외, 괴랄복통, 기절초풍할 이야기를 시각화할 때 상대적으로 비용이 가장 적게 들며, 혼자 작업한다거나 파트너만 잘 만난다면 한계가 거의 없다.

영화와 드라마의 장점은 단연 파급력이다. 쓰고 있는 스토리가 고증, 균형, 대중성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영화나 드라마로 써보는 것이 좋다. 이중 균형이란,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사건이나 조연급 이상의 인물을 열고 닫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18) 웹툰 〈은퇴한 아이돌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50화로 기획했는데 다양한 요소의 개입으로 27화로 마감해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연재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나를 한동안 들끓게 했던 엄세윤, 정이품 작가의 〈국민 사형 투표〉는 처음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민’이라는 인물이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두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작정이면 어떤 떡밥이든 반드시 회수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잘 다듬어 영화나 드라마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만 되면 작가는 네임드가 된다. 네임드가 꼭 지속 가능한 수익이나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보편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지금 구상하는 것 중 코피노 이야기는 출판소설에, 아치 호러는 웹툰에, 폴리아모리 이야기는 드라마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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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문서인 A4는 210 ×297㎜이다. 카카오페이지 웹소설 판형은 72 ×109.8㎜로 모바일에 최적화되어 있다. 한 문장이 다음 장으로 넘어갈 만큼 길어지면 독자가 불편해한다. 블로그형의 다른 매체에서 재미있었던 웹소설을 다듬지 않은 채로 카카오페이지로 가져오면 가독성 때문에 재미가 확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판형을 잘못 활용한 예로는 《아비 무쌍》이 있고 잘 활용한 예로는 《곰탕》이 있다. 카카오페이지 판형은 지난 NEXTPAGE 공모전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17) 엔딩 마법은 모든 연재물에 필요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시간이 길고 웹소설은 글로 되어 있어 이야기 전개를 많이 할 수 있다. 웹툰은 되도록 글이 짧아야 해서 사건의 전개와 엔드점이 모두 함축적이면서도 임팩트 있어야 한다. 웹툰에서 엔딩 마법을 끌어내기가 참 드럽게 힘들어서 오히려 배우기 좋다는 뜻. 또 웹툰은 일상툰, 개그툰, 4컷 만화 같은 옴니버스도 있는데, 앞의 예는 극화 장르의 엔드점을 말한다.

18) 다만,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회수하지 못한 떡밥들을 볼 때 속이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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