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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Mar 05. 2018

하나. 나사가 하나 빠졌어요

아니, 두 갠가? 아니면 그 보다 많이? 

무언가 비었다. 

무언가 빠졌다. 

의욕과 열정이 단 시간에 타올랐다가 더 깊게 주저 앉기를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지연이라 생각했던 오늘의 인내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라. 최근 들어 고진감래(苦盡甘來), 와신상담(臥薪嘗膽) 이런 사자성어가 정말 싫었다. 어떤 고생을 얼마나 참아야 단 게 오는지 얼마나 오래 이를 악물고 쓸개를 삼켜야 할지 모르겠더라. 애초에 지난 고생이 참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참을성이 없어졌다는 건 알겠는데 왜 갑자기 참을성이 없어졌는지 답답함은 어디서 부터 무엇 때문에 온 건지 몰라서 더 답답했다. 


*만족지연 : 1970년에 실행된 스탠퍼드 마시멜로 실험에서 도출해낸 이론으로 더 큰 만족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1882년 1월 21일 헤이그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171번째 편지.  고흐는 늘 편지 한쪽에 습작을 그려 동생에게 보냈다. 




1880년 7월 

133


(중략)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의 게으름뱅이도 있단다. 어쩔 수 없이 게으름뱅이가 된 사람,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엄청난 욕구에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무언가에 갇힌 듯한 이 사람에게는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부족하단다. 불가피한 상황들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늘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지.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느낀단다. '그래도 난 무언가에 쓸모가 있으며 나의 존재 이유를 느낄 수 있어!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될까? 무엇을 할 수 있지? 내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대체 그게 뭘까?' 

(중략) 

봄에 새장에 갇힌 새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알고 있단다. 그런데 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분명히 느끼면서도 속수무책인거야. 그게 무얼까? 좀처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있어. "다른 새들은 둥지를 짓고 새끼를 낳아서 기르지" 그는 혼자 이렇게 말하며 새장의 창살에 머리를 부딪는단다. 하지만 새장은 그대로 있고, 새는 슬픔으로 미쳐버릴것만 같지. 

                                                                                                          Vincent Van Gogh

                                                                                                           A Self-Portrait in Arts and Letters 



필연이나 신의 계시처럼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아니었다.  답답함을 이겨 보려고 철학책, 감정에 관한 책, 인지심리학, 교육학, 정신분석학 외 시나리오 실용서, 과학책 등을 뒤지다 말고 혼자 지쳐 버렸을 때 그림이나 보면서 머리 좀 식힐까 하고 집어들었다가 고흐의 편지들을 발견했다. 이 편지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나는 고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나는 그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이기지 못해 사회에서 유리된 사람', '처음부터 그림만 생각했기에 어떤 소명을 가질까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여겼다. 고흐의 일대기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미친 천재'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작품이 일종의 비운의 감정을 준다던가, 전시를 언제 어디서 한다던가, 감정가가 얼마라는 것 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을 거라 생각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조차 대부분의 견해가 그렇다고 인정한다. 


새장의 갇힌 새에 대한 비유가 대단히 신선하지는 않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꽤 진지하다는 것과 조심스럽다는 것. 나는 그가 꽤 호기로울 줄 알았다. 그가 스스로를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여기자 당황했다. 최근들어 비슷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나는 생산적인가? 내가 과연 쓸모가 있긴할까? 새장의 비유는 보통 자유를 속박하는 어떤 것으로 여기고 새장만 열어주면 새가 훨훨 자유롭게 날아갈 것 처럼 이야기한다. 이 해묵은 비유는 새삼 많은 질문을 던져줬다. 안에 있는 게 나을까 날아가는게 나을까? 날아가는 게 낫기는 할까? 굳이 날 수 있는 것과 안전하다는 것을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새장이 있기는 한건가? 내가 있지도 않은 허구의 새장을 내 안에 키운 건 아닐까? 아니면 내가 완전히 자유한 줄 알고 날아올랐던 그 하늘은 날아도 날아도 벗어날 수 없는 새장의 일부일 뿐일까? 


책 <협력하는 괴짜> 는 매 18개월이면 기존 지식의 2배씩 축적되는 사회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식의 축적속도, 기술의 발전 및 응용속도, 생활방식의 변화 속도는 계속 빨라지고 있다. 나는 뭔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누군가가 더 잘하는 것이고 이미 누군가가 더 잘하는 것은 AI가 가장 잘하는 것인것만 같다. 그럴수록 내 텅빈 통장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나의 절실함과는 다르게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는 커진다. 무엇보다 지치는 건 나의 쓸모를 증명하려 할수록 에너지가 크게 소모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 조차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정말 필요한가? 


쓴 웃음을 지울 수 없는 건 2018년의 내 고민이 1880년의 청년 고흐에게도 진하게 묻어 있다는 거다. 

나의 존엄찾기는 이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본다. 


'그래도 난 무언가에 쓸모가 있으며 나의 존재 이유를 느낄 수 있어!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될까? 무엇을 할 수 있지? 내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대체 그게 뭘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298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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