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회사에서 사적인 슬픔을 접했을 때
바로 옆팀의 팀장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 소식을 들었다. 회사에서도 재택근무를 권장하고 있는 만큼 코로나라는 사회적 상황이 우려스럽기도 하고, 장례식장의 위치도 회사에서 차로 5시간 정도 걸리는 지라 팀원 전부 모두 가지 못하고 팀을 대표하는 몇 분만 장례식장에 갔다.
이렇듯 회사에서의 부고는 개인의 의지 외에 상당히 많은 다른 요소들이 있고 유난히 뇌리에 남는다. 회사라는 공간은 사적인 영역이 아예 개입되어 있지도 않지만 또 아예 배제된 것도 아닌 곳이니까. 공적인 태도가 정말 중요한 회사라는 공간에서의 사적인 부고 소식은 우리가 같은 하루를 살아가며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이제 곧 있으면 아빠가 내 인생에서 없던 게 벌써 십 년이야. 시간이 참 빠르다."
아빠의 산소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엄마에게 어제 내가 건넸던 말이다. 나의 20대는 아빠의 부재를 온전히 느끼고 슬픔을 보내고, 그 부재를 다음 행복으로 어떻게든 채워 나가기 위해 딛고 지냈던 나날들이었다. 회사에서 들은 부고 소식에 아빠가 돌아가시던 그날이 떠오른다.
21살에 돌아가신 나의 아빠. 29살이 되어 다시 떠올려본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는 날 참 내 대학교의 위치가 처음으로 야속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서울 병원의 아빠의 중환자실까지 가는 데는 4시간. 이번 주 내내 수업을 못 듣고 연락이 잘 안 될 수 있다는 소식을 과 회장에게 남기며 잠깐의 사회생활 정신으로 부고를 알리고, 4시간 내내 훌쩍이며 타고 있던 유난히 느렸던 그 고속버스에서,
그때는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길 바라고 바랬다. 제발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 아니 3일만. 이렇게 생각하다가 도착한 중환자실에서 아빠를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은 15분 남짓이었다. 눈 한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사경을 헤매면서 마지막의 순간을 함께 하려고 했던 것은 지금 떠올려 보면 아주 다행스러운 아빠의 선물이었다. 아빠는 위독한 상황에 중환자실에 옮겨졌을 때부터, 오빠와 내가 지방에서 올라오는 그 시간을 버티고 우리 둘의 얼굴을 모두 보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10분 전, 아빠가 마지막으로 나를 보면서 애칭을 불렀다.
"예쁜이." 그 말을 뒤로 아빠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훗날 내 장례식에 와줬던 동기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목포에 내려가 장례식장에서 자리를 지켰을 때, 동기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제야 너를 이해할 것 같아. 너 참 힘들었겠다."
이렇듯 사람의 죽음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한 경험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상황 속에서도 그때의 나로 상황이 더 넓게 보인다. 팀장님은 엄마의 마지막을 봤을까. 마지막으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시간이 있었을까. 고향으로 내려가는 마음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공적인 나의 모습만, 사회생활하는 나의 모습만 아는 사람에게 극단으로 치닫는 슬픔의 사적인 영역을 열어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게 어떤 기분일까. 고마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엄청난 마음의 빚을 지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어떤 걸까.
2년 동안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재직 중인 회사에서
울려오는 전화로 내 친구가 빗길에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엄마로부터 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메일함 속 메일에는 직원 분의 귀한 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이렇듯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부고는 항상 일어난다. 어쩌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네가 잊고 있었던 소중함이 있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회사라는 공적인 자리에 섞인 개인의 슬픔을 잠깐 뒤로 하고 회사생활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삶이 어쩌면 얼마나 슬플지 모르겠다.
딸의 교통사고 이후 다시 출근한 직원 분의 메일에는 직접 탯줄을 자른 뒤 품에 안았던 딸이 하루아침에 떠나니 인생이 허망하기 그지없다는 말과 함께 찾아와 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이 담겨있었다. 마음이 묵직해지는 부고의 소식을 들은 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없이 무탈히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는 어쩌면 불가한 바람을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