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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Jan 31. 2020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운 리얼리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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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은 물론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유럽 문학은 ‘예술과 삶’을 합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는 모습을 묘사했던 것이다. 그 결과, 주인공이 바라거나 계획한 그 무엇도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이 염원한 모든 것은 ‘비현실적’ 인 것, 즉 순수 환상이라고 판명되었다. 이 같은 리얼리즘 전통에서 비롯한 최선의 귀결은 68운동을 통해 ‘현실적으로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고 표명되었다. 그리하여 리얼리즘 문학과 미술에서 묘사하는 대상은 – 자연 과학에서 기술하는 대로의 –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충격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의 심리(psyche)를 일컫는다. 19세기 리얼리즘은 사실상 심리주의(psychologism)였다. 현실은 ‘객관적’인 과학적 탐구의 장소가 아니라 주인공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파멸시키기까지 하는 억압적 힘이라고 이해되었다. 반대로 근현대 미술은 탈심리화의 오랜 역사적 산물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와 같은 비평가들은 이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역사로 경험하였다. 아방가르드와 포스트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이 리얼리즘적(realist) 이지 않고 실재적(real)이기를 원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과정만큼이나 실재적이기를 말이다. 예술작품은 나무나 자동차 같은 다른 여러 사물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었다. 이는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려 반대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급진화했다는 의미이다...그런 이유로 예술과 문학은 심리주의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인간 형상은 색채와 형태의 유희로, 또는 단어들의 유희로 사라져 버렸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사실성은 심리를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되었다. 그것이 저자의 심리나 저자 캐릭터의 심리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탈심리화 전략은 지극히 정당해 보인다. 확실히 심리는 접근할 수도, 과학적 대상으로 삼아 탐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가 있다 – 즉, 외적으로는 진단될 수 없더라도 현실에 대한 내적 불만이 있다 – 는 가정이 순전히 허구적이라고 기각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달리 말해, 내면의 심리적 불만은 폭력적 행위가 발생하기 전에는 허구적인 듯 보이지만, 그 행위가 일어나면 소급하여 ‘실재’가 된다. 재차 말하면, 자신의 여러 소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이 같은 소급적 시도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바로 그 소설들이 보여주는 바는, 다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동일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 문학 전체는 기본적으로 범죄 문학이다. 여기서 인간은 특히나 위험한 동물로, 정확히는 ‘심리적’ 동물이기 때문에 위험한 동물로 다뤄진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예술가가 심리적으로 경험하는 대로 묘사한다. 마르크스가, 그 이후에는 루카치가 발자크를 비롯한 여타 프랑스 리얼리즘 사조의 작가들을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이 사회, 경제, 정치적 현실을 ‘시스템’으로서 기술한 데 반해, 이들 작가는 현실을 반목하는 갈등과 절망의 터로 ‘심리적인 측면에서’ 묘사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출된 심리적 불만이 갖는 혁명적 잠재성을 주제로 삼았다 – 이때 불만은 ‘객관적’ 통계자료에 의해 가려졌고 아직 일상의 표면을 뚫고나오지 못했던 상태에 있다. 픽션은 그 픽션이 현실에 진입할 때, 다시 말해 예술에서 묘사된 심리적 갈등이 혁명적 행위로 이어질 때 현실이 된다. 이 혁명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리얼리즘적 픽션’은 픽션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리얼리즘의 귀환은 심리적인 것의 귀환, 그리고 억압하는 힘으로서 경험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 귀환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다. 리얼리즘은 ‘평범한 사람들’ 이나 ‘노동자 계급’같이 예술 시스템 너머에 있는 여러 현실을 묘사하는 예술 형태라고 오인되고는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예술 시스템은 이미 현실의 일부이다. 리얼리즘은 예술 시스템 바깥을 묘사하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바, 즉 주인공이 경험하는 예술 제도라는 현실들에 대한 불만을 폭로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작가와 미술가가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실패했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에야, 그들은 현실에 순응한다는 것, 다른 모든 이들이 말하는 평범 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기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내면의, 심리적인 문제는 바깥으로 투사된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에 어떠한 의미나 목적도 없음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 때조차도 자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유에 의문을 품었다고 쓴 바 있다. 그는 이 물음을 통해 문학을 비롯한 지적 활동을 하는 특권적 집단 너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톨스토이의 가정, 이른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방식 안에서 내적으로, 즉 심리적으로 갈등하며 그들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경험한다는 가정이 순수 픽션 – 즉, 톨스토이가 자기 내면의 갈등을 타인의 심리에 투사하는 것 – 은 아닌지를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폭력적 파열은 톨스토이의 진단을 그의 사후에 확증했다. 그렇기에 작가와 미술가는, 리얼리스트가 되고 싶다면, 인간 심리에 대한 묘사가 순수 픽션이라는 의심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역사가 그들의 작업에 담긴 리얼리즘을 확증해줄 때까지 말이다."


출처 : http://tigersprung.org/?p=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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