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자연의 숭고한 비극을 상연한다. 물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들은 자애로운 모성적 자연과는 대조되는, 그것의 자기 파괴적인 이미지를 암시한다. 이때 이미지는 대상(바다) 쪽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다를 바라보는 주체 자신의 내적 표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압도적으로 거대한 자연물 앞에서 주체가 인식의 한계에 봉착하는 이상, 그는 대상으로부터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즉 표상을 가능케 하던, 감성-상상력-지성 사이의 매개 관계가 일시적으로 붕괴되고, 이러한 인식 능력들 간의 불일치를 새롭게 조율하기 위해, 초월론적 영역에 해당하는 (순수)이성이 일깨워진다. 주체는 이제 '이미지 없는 사유'에 도달한다.
칸트에게 사유란 오히려 인식의 끝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 바로 그 인식 능력에 새로운 규칙을 부여하는 이성에 의한 입법 활동이다. 달리 말해서 칸트에게 이성은 지성의 바깥에서, 그것을 이끄는 지도 규칙인 법전에 해당한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초월론적 '전제'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 자신은 인식 능력의 붕괴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어떻게 보면 숭고는 인간 자신의 무능력을 위로하는 일종의 유머인 셈이다.
즉 유머는 자기 분열성을 동반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 속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을 희극적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를 소환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유머인 셈이다. 숭고는 불쾌 속의 쾌, 따라서 쾌와 불쾌 사이의 이율배반을 드러냄으로써 초감성적인 영역을 개방한다.
더 나아가 칸트적 윤리는 감성을 넘어서서 자기 객관화의 거리를 유지하는 분열된 주체성에서만 출현한다. 아름다움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거리로부터 발생했다면, 숭고에서 우리는 그것이 사실상 인간 자신의 내적 간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의 자유는 태초의 자연으로부터 그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숭고는 특정 공동체에서만 유통되는 공통감(일반성)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보편적인 공간을 예비하는 특수한 직관적 감성이다. 즉 숭고한 쪽은 결코 자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자기 파괴적인 과정으로서만 존속하는 인간의 자유의 여정이야말로 칸트가 보기에는 진정으로 숭고하다. 따라서 자유는 자유롭지도 않으며 그다지 자연스럽지도 않은, 우리가 다만 점근선적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는 미지의 x, 또는 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