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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Jun 27. 2021

공포영화에 매혹당하는 이유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재밌어요. 간만에 몰입해서 봤습니다. 공포 영화이지만 동시에 어린 아이들의 성장담, 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미국의 어느 지역에 운석이 떨어집니다. 운석과 함께 지구에 도착한 괴물들.... 인간들은 순식간에 짓밟힌 토마토처럼 으깨지고 이내 주스로 변합니다. 이 외계 믹서기가 위치를 추격하는 수단은 고성능의 귀입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엄청나게 먼 거리에서도 소리를 듣고 빛의 속도로 달려와서 인간 주스를 척척척....


한마디로 콰이어트 플레이스에 등장하는 괴물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무제약성이 인간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어른들은 숨어지내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죠. "이봐요 아조씨. 우리에게 되돌아갈 집이 어딨어요?" 무능한 어른들을 아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괴물을 무찌를 수단이 있다고 아이들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괴물은 일종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관객들 각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투사해서 관람해봐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감독은 괴물을 무찌르는 것은 상상력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상상력이야말로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고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빛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상상력만으로는 부족하죠. 어른들은 아직은 미약한 아이들에게 실행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과 실질적인 수단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괴물을 무찌르는 것은 결국 아이들이에요. 괴물은 상상 속의 존재이기에 아이들만이 대적할 수 있거든요.


Ps.


지금부터는 TMI입니다. 결국 <콰이어트 플레이스 2>를 지탱하는 것은 사라진 부성권력을 대체하려는 다양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서사를 원근법적 회화에 비유하자면, 초반부터 소실점에 해당하는 '아버지'(가족들의 실질적 아버지 또는 상징적 의미에서의 미국이라는 사회 그 자체)가 사라진 뒤입니다.


소실점이 사라졌기에 원경과 근경의 배열은 무너지고, 이는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한 괴물들의 순간이동으로 묘사되었습니다(코로나19가 연상되는 지점입니다). 소실점이 사라졌기에 소실점에 의존적인 주체의 위치 또한 교란되는 것입니다. 좌표를 상실한 주체의 불안.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동력이라고 느꼈습니다. 따라서 영화 안의 모든 요소들은 주체(등장인물)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재배열됩니다. 물론 불안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 부재하며, 그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입니다.


 관객의 눈은 내화면(검은 사각형) 속 등장인물들의 불안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거나, 프레임 너머의 외화면에서 돌고 있는 카메라의 전지적인 시점(흰 사각형)에서 관조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던 괴물이 가시화되는 순간입니다. 관객이 불안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순간은 내화면 속 등장인물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물리적으로 보자면 관객은 이와 무관하죠.


관객은 정서적으로 동일시한 주인공과의 '거리 1', 그리고 등장인물의 눈에 비친 괴물에 의해 살해되는 피해자들과의 '거리 2'. 이렇게 두 가지 거리에 의거해서 영화를 감상합니다.  물론 세 번째 거리는 감독과의 거리입니다. 이러한 '거리 3'은 영화적 서사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메타적으로 본다면 이 거리 3에 해당하는 것이야말로 비가시적인 상태의 괴물이겠죠.


하지만 관객이 검은 사각형을 벗어나서 흰 사각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몽타주적 배열 방식에 우리가 주목하기만 하면 됩니다. 씬과 씬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에 주목할 때 관객은 이미 내화면(검은 사각형) 너머의 외화면(흰 사각형)에서 전체 구조를 관조하게 됩니다.


물론 영화는 회화와 다릅니다. 다시 위의 그림을 통해서 설명하자면, 검은 사각형과 흰 사각형을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위치는 카메라의 운동성 속에서 녹아버립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영화적 기표들은 기관 없는 신체(들뢰즈)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외화면과 내화면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기표, 그것은 상징화될 수 없는 텅 빈 기호이거나 한 곳에 거주하는 것에 저항하는 유목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들뢰즈의 동시적 존재론은 이미 본캐와 부캐란 단어로 한국에서 상용화되지 않았나요? 최근의 광고들은 본캐와 부캐를 나눌 수 있는 자유를 강요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노동자(본캐)와 소비자(부캐)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식의 환상을 주입시킴으로써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환상이야말로 <콰이어트 플레이스 2>와 같은 공포영화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공포는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감각에 충실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자아를 위축시키고 위축된 자아의 멱살을 질질 끌고 다닙니다. 어떤 감정보다도 지향적인 감정이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포스러운 대상을 통해 주체의 위치를 확정합니다. 막연한 불안감보다는 확실한 공포감이 더 좋을 때가 있어요. 우리가 공포물에 매혹당하는 이유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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