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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Feb 08. 2022

지금 우리 한국은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리뷰


<지금 우리 학교는>의 배경은 일단은 학교입니다. ‘일단은 학교’인 이유는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이 효산 고등학교에서 효산시 전체로 점차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좀비와 바이러스는 학교에서 도시 전체로 시점을 이동시키는 교량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크게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고,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좀비와 바이러스는 (소수든 다수든) 집단 내부의 유기적인 결속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좀비와 바이러스는 관계를 생성하는 교량이자 다리인 동시에(바이러스는 감염되고 확산됩니다),  절단시키고 파괴합니다(바이러스는 인간 개인 간의 면역학 체계를 가동시킵니다. 심지어 친족 간에서도). 이러한 양가적이고 상반되는 두 가지 역할이 좀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흔히들 인간과 동물을 도구의 사용유무로 구분합니다. 주인공 청산과 수혁이 좀비와 싸우기 위해 드는 것도 밀대와 기타입니다. 이 드라마의 빌런에 해당하는 윤귀남도 처음에는 식칼을 들고 좀비들과 대적합니다만, 곧장 같은 인간인 학교 친구들과 급식소 아주머니들을 자신을 보호할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좀비로 변한 윤귀남이 도구를 사용하는 일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점인간의 또 다른 ‘도구’에 해당하는 언어에서도 발견됩니다. 청산과 수혁은 그리고 효산고 아이들은 언어를 소통과 결속의 도구로써 사용하는 반면 귀남은 ‘죽인다’는 말 이외에는 딱히 하는 말이 없습니다. 살인충동 또는 복수라는 일념이 선행하고, 언어는 그것을 사후적으로 보충할 뿐입니다.


청산과 아이들은 집단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도구로써 언어를 사용합니다. 언어적 차원에서만 보자면 귀남은 ‘희망’과 같은 추상이나 관념을 전달할만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삶의 목표와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인간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결점입니다. 귀남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한쪽 눈을 실명시킨) 청산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인데 복수가 완성된 이후에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이러한 질문을 피할 수 없는 인물이 또 있다면 아마 (같은 변종에 해당하는) 남라와 은지일 것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는 남라의 사회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일종의 성장담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좀비와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라의 상징적 지위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 벌어진 봉합할 수 없는 틈, 유기체적 사회 대한 믿음을 가로막는 민주주의 자체의 증상적 지점으로 식별됩니다.


5년마다 치루는 대선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민주주의 사회에 내재한 항구적 긴장과 갈등상태입니다. 선거 시기에 사회는 유기적 통일체로서 존재하기를 멈추고 원자화된 개인들이라는 우연적 집합으로 변모됩니다(앞서 말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간극이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확률적 과정, 유기적 통일체의 일시적인 해체의 순간 없이는 민주주의는 곧장 불가능해집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민주주의란 권력 이양의 위기의 순간에 내재한 비정상성을, 정상적인 것에 해당하는 구조의 일부로 완전히 승인한 정치체입니다.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대통령은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의 비합리성, (이성적이기는커녕) 국가의 자연적인 성격 그 자체를 표상합니다. 달리 말해서 국가는 대통령의 자연적인 ‘신체’ 없이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남라가 진정으로 반을 대표하는 반장이 되는 시점은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가 아닙니다. 그녀는 좀비들이 무너뜨린 제도 바깥에서, 일종의 자연상태 속에서만 반장으로 호명될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5년마다 이뤄지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드라마틱한 묘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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