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다시 들춰보지 않은 소설들이 많아서 소설 읽기의 경우 초반 50페이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값에는 독서 환경에 대한 비용도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책만 사는 게 아니라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줘야 아이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서는 연애와 비슷합니다. 추천도서를 읽는 일은 소개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책을 만나러 서점에 가는 것은 우연한 만남에 해당합니다.
온라인 서점이 활성화된 현재 시점에서 책구매는 대개 핸드폰 화면을 거쳐 이뤄집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듀오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홍보문구와 한줄평 등의 데이터를 통해 책을 비교하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직접 내가 책을 만나러 가면 그것이 단지 화면 속 정보값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단 책의 물성과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서두 10페이지(미리보기)가 아닌, 페이지 어디든 펼쳐 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러다가 문득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이 있습니다. 책의 홍보문구도 아니고 표지 디자인도 아닌, 단지 검은 글자로만 이뤄진 어느 한 문장에서 우두커니 멈춰서는 순간이.
당신은 무언가에 홀린듯이 책값을 지불하고 그것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선택한 당신 자신을 읽게 됩니다. 당신의 취향과 당신의 정치적 성향, 일상의 습관, 인생관 등을 반영해가며 종이로 만든 거울을 들여다보듯.
마침내 책을 덮은 당신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띠지에 속았다, 결말이 너무 허무하다, 작가가 지나치게 염세적이다 등등....
하지만 이것은 연애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연애는 속아서 하는 게임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하지만 무수한 애정관계 속에서 얻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취향입니다. 취향은 단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취향은 단련되는 것에 가까우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무수한 실패를 거치며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라고 물으신다면 아이들을 서점과 도서관에 자주 데려가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인생에서 찬란한 한 번의 성공보다는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을 견디는 지구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계절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소설가도 말했듯이 인생은 장기 레이스에 가깝습니다. 한 번에 쉽게 이뤄지는 것은 대개 시간의 힘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책도 사랑도, 결국 시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