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님께 연락을 받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새벽 1시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번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번 모임에도 참석이 어렵게 되어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름에 수박을 먹으며 읽기 좋은 소설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함께 읽어보자고 했어요. 애석하게도 제 불찰로 인해 이뤄지진 않았지만..ㅜ
그런데 이러한 죄의식은 제가 이번에 추천한 <<저주 토끼>> 곳곳에도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몸하다>에서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주인공에게 불행이 닥쳐오기도 합니다. 또한 325 페이지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정보라 작가도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다고 해요.
오늘날 인과응보와 같은 단어를 믿는 분들은 아마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토끼>>의 어떤 구절들은 우리의 이러한 불신을 넘어서서 일종의 쾌감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저주토끼>에서 ‘사장’은 타인을 짓밟은 죄로 아들과 손자를 잃게 되고 <머리>에서 ‘나’는 ‘머리'를 환대하지 않았다는 죄로 변기통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정보라의 소설이 주는 느낌은 인과응보에 근거한 전래동화가 전달하는 느낌과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전래동화는 정보라의 소설처럼 끝이 비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전래동화가 삶을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모델로써 존재한다면 정보라의 소설은 삶은 끝내 알 수 없는 것에 가깝다는 회의주의자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시작되어 20세기의 러브 크래프트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문학사적 계보입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만한 여력은 지금 제게 없으므로, <저주 토끼>를 다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저주 토끼>가 전래동화처럼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면 친구를 죽인 ‘사장’을 처벌한 ‘할아버지’는 정의 그 자체 또는 인간사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신(‘할아버지’)은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죽게 됩니다.
정보라의 소설 속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신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공포,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세계 원리에 직면한 인간의 공포입니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신이 부재한다는 사실, 달리 말해서 인과율에 의존한 세계 구성 원리 자체가 결국 무의 빈 공간 또는 차가운 시스템(기계)에 가깝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케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언캐니한 감각(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는 감각)을 전달합니다. <안녕 내 사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사람처럼 웃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ey란 인공 존재의 외모뿐 아니라 행동을 받아들일 때도 적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p. 125) 선한 인물에 해당할 거라고 믿었던 주인공이 그가 혐오했던 대상에 의해 부조리하게 단죄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믿는 선도 언제든지 악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ex. <머리>, <안녕, 내 사랑> 등)
책을 읽는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두 패 중 분명 선을 골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이 끝날 때 쯤엔 깨닫게 됩니다. 다르다고 생각했던 두 패가 사실을 동일한 한 장의 카드였다는 사실을. 이것은 작가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힌 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부조리한 게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주토끼>>를 통해 이러한 부조리를 즐겨주시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말에서도 동일한 뉘앙스로 쓰였듯이) 우리 모두가 부조리를 겪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어쩌면 부조리를 견뎌내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