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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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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Feb 13. 2021

연약함을 들키는 일

  내가 겁이 많고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장 늦게 안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그전에는 스스로의 강인함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울감에 빠지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그로 인해 삶이 더 나빠질 만한 선택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을 수 있었고, 그 형상은 나를 속이고 또 속여왔다.




  미성년을 지나 성인이 된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고, 겪을 줄 몰랐던 일들을 겪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대학생이 된 나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격렬하게 앓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낯을 많이 가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들어했던 나는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어서 오세요’라는 말을 건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 때조차 몇 번을 망설일 만큼 말주변도 없었는데, 호프집에서 정직원으로 일하면서는 술에 취해 따지고 드는 사람들의 말이 안 되는 말을 말이 되는 말로 수십 번씩 고쳐 말해주어야 했다.


  가장 낯설고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나를 내려보아도 될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깔보는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었다. “야” 혹은 “어이”라고 불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 달려가 “필요하신 것 있으세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러한 상하 관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내가 당신들에게 어떠한 반격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함부로 대했다. 슬쩍 머리카락이나 엉덩이를 스치는 성추행, 자기네들끼리 “살아 있네” 등의 영화 대사를 따라 하며 낄낄거리는 성희롱, 담배를 사다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그때 당시에는 호프집에 따로 금연구역이 없었다.) 들어야만 했던 욕설까지 모든 것이 지워지지 않을 생채기가 되었지만 나는 그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아무런 반격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심한 날엔 고시원에 돌아가 혼자 서러워할 뿐이었다.


  호프집에서 1년은 정직원으로, 나머지 시간은 아르바이트로 합쳐서 3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조금은 그런 일들에 무던해지게 되었다. 나는 변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날이 선 말 한마디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떨어대던 모습이나 모욕적인 말을 듣고 억울함에 엉엉 울어댔던 모습보다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릴 줄 아는 것이 더 현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이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달려가 필요한 것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결코 그들에 대한 승리일 순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성장했다고 느꼈다. 사회생활을 통해 조금은 강인해졌다고, 어쩌면 다른 또래보다 더 단단해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니 성격이 많이 변했네.”


  그러한 나의 도취를 성격이 많이 변했네, 하는 말로 확인시켜준 사람은 고등학교 때의 친구 봄이었다. 봄은 가끔씩 나를 놀라게 했는데, 가장 관심 없을 것 같이 털털하게 굴면서 각별한 관심이 없다면 하지 못할 말들을 뱉곤 했기 때문이다. 그 말들은 주로 잘 들어맞는 편이었고, 성격이 변했다는 말도 부정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맞제? 내 생각에도 그렇다.”


  꽤 뿌듯한 기분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대인관계가 좁았던 나와 달리 쾌활하게 두루두루 어울렸던 봄은 항상 무리의 가장 뒤편에 있는 내 어깨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두르고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가장 처음으로 이 친구에게 놀랐던 것도 그 어깨동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자아이들끼리 흔하게 하는 스킨십, 팔짱 끼기나 손잡기는 익숙한 편이었지만 봄을 알기 전까진 누구도 내 어깨에 손을 두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봄과 나는 같은 반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3년 내내 친구였다. 급식시간마다 함께 밥을 먹고, 기숙사 같은 방을 쓰고, 야자가 끝난 뒤 야식도 함께 먹었다. 항상 나를 장난 삼아 “으이그 찌질아”하며 불러댔던 봄에겐 늘 주눅 들어 있고 말없던 내 모습이 익숙했을 것이다. 그런 봄이 내 가정환경을 알았던가 몰랐던가,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나는 봄에게서 많은 물건을 빌려 썼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기숙사의 겨울날 바디로션이 없어 얼굴에 바르는 로션을 다리에 발라대고 있으면 “이거 써라”며 제 것을 건넸고, 어느 정도는 그런 일들이 익숙해져 있을 만큼. 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은 굳이 확인하지 않는 희귀한 아이였다.


  그런 봄이야말로 변한 나의 성격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다른 친구들은 연락이 끊긴 것이 대다수였고, 대학교 때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나의 과거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이 보기에도 그렇다면 나는 정말 강해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변한 모습을 보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원래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봄은 내가 다니는 대학교 앞에까지 놀러 온 참이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고등학교 때 알던 친구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고, 각자의 대학 생활은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한참이었다. 그렇게 얘기 나누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걷기 시작했다. 대학교 앞의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나 지하철과 학교의 중간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사거리는 ‘그 사거리 앞에서 보자’는 종류의 약속 장소로도 유명했다. 그날도 사람이 많았고 몸을 사리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왔다. 여자는 어리둥절한 내 눈 앞에 뭔가 써진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종이에는 삐뚤한 글씨가 가득 써져 있었는데,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본인이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장애인이며, 돈이 없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비로 사용할 몇 천 원만 빌려준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단숨에 그것이 사실인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지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꾸만 종이를 들이미는 여자를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동정심이 들어서인지, 기세에 눌려서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떨결에 지갑에 갖고 있던 오천 원을 고스란히 내어주고야 말았다. 그 오천 원이 다음 아르바이트 월급 전의 전재산이었던 것은 여자가 떠난 뒤에야 불현듯 생각이 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봄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런 행위가 구걸의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호하게 뿌리치기에는 둘 다 어렸다. 나는 “변했다”는 말을 듣고 뿌듯해있던 참이었기에 부끄러운 마음도 함께 들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봄에게 털어놓았다. 아마도 저 여자의 종이에 쓰였던 글은 사실이 아닐 것이며, 나도 모르게 내어준 저 오천 원이 내 전재산이었다는 것을.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봄과의 만남에서 쓰일 돈을 계산한 끝에 남길 수 있었던 오천 원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돈이었다. 오천 원으로 무얼 할 수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생계가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오천 원이 월급날까지 버틸 돈이라면, 그 돈은 딱 그 시간 자체만큼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그 시간들을 잃고 눈에 띄게 당황하는 나를 보며 봄은 지금까지도 그랬듯 궁금했을 질문들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오천 원이 전재산이냐, 그러면 다음 월급날까지 어떻게 할 거냐, 사기인 줄 알면서 왜 내줬냐, 하는 그런 질문들.


  “이거 써라.”


  봄은 지갑에서 꺼낸 이만 원을 선뜻 내게 건네주었다. 참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친구에게 돈을 받는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나는 그때 누군가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돈을 받아쓰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나는 오천 원을 내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얼떨결에 그 돈을 받았다. 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안심하는 나를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변한 줄 알았더니 변하지 않았네, 하고.


   그 뒤로도 나는 그 일이나, 내 성격이 원래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강해지는 스스로를 믿고 격려하며 지냈다. 그러던 내게 스스로의 연약함을 마주치는 순간은 예고 없이 다가왔다. 어떤 사건처럼 ‘발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 차례의 항암 치료 후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처음의 진단을 번복할 정도로 상황이 나아진 엄마는 눈이 내리던 날 수술실에 들어갔다. 나는 그때도 담담했으며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날, 방사선 치료를 위해 언니와 엄마가 새벽 일찍 서울로 떠날 때, 비몽사몽 한 상태로 두 사람을 배웅하고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상대를 발견한 연약한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두려움이나 어찌할 줄 모르겠는 마음 같은 것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고 확신했는데 문득 두려워졌던 것이다. 모두 떠난 집의 빈 공간이 두려워졌고 그 날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상태는 분명 전보다 나아졌고, 두 사람이 서울로 안전하게 갈 것이 분명한데도 그랬다. 영문도 모른 채 이불을 몸에 말고 천장을 바라봤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형상들이 내가 나인 줄 알았던 모습들인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확신이 드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그러한 맥락 없는 갑작스러운 순간에 내가 떠올린 것은 그 오천 원이었다. 내가 써 내려가는 글들을 읽고 너 참 그동안 수고했구나, 말해주었던 봄은 어쩌면 지금도 알고 있을까. 나만 몰랐던 나의 연약함에 대해. 알고도 내게 수고했다 말해주었던 것이라면 들켜도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두려워했던, 어쩌면 항상 겁에 질려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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