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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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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an 26. 2021

막내딸이지만 애교가 없어서

  애교가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자주 슬픈 일이 된다. 특히나 막내딸이라는 직무를 지닌 채 태어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 가지 위안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을 슬픈 일로 규정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주로 나를 불쌍히 여기거나, 기특하게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관심이 없거나 하기 때문에 내가 애교가 있든 없든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끙끙 앓을 정도로 애교 없는 스스로를 안타까워하곤 했다. 그땐 좀 더 크게 기쁨을 표현했어야 하는데, 혹은 그땐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등.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좀처럼 표정을 짓는 일이 없으며 과하게 예의를 차리곤 하는 스스로가 지독히도 마음에 안 드는 그런 슬픈 순간들이 있다.


  내 생의 어느 시기이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 이기라도 한 것처럼, 만날 때마다 밝게 웃으며 꼭 안아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분명 내가 그들에게 있어 그런 귀한 환대를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환대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고작 어색하게 웃어주는 게 다였던 나는 그 몸과 마음의 표현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부러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나는 스스로의 어딘가 고장 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밝음과 에너지를 관장하는 신경계의 어딘가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좀처럼 그 고장은 고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환대를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은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를 보며 밝게 웃는 누군가에게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고작인, 스스로의 표정이 얼마나 어색한지 알면서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배짱도 없는, 딱 그 정도로 슬픈 사람.


  시간이 지나 나를 환대하는 사람에 대해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더 슬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밝게 웃을 줄을 알고 직접적인 표현 없이도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다. 목각처럼 뻣뻣이 서 있던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던 그 친구의 부모님은 서로를 안으며 인사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환한 미소로 친근감을 전할 줄 알았던 친구는 가족들끼리 나눈 다정한 대화를 전해주곤 했다. 그들에겐 일상인, 어떤 사람들에겐 신기할 수도 있는. 결국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런 사람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족은 어떤가. 나는 눈을 감고 엄마 품의 감촉이라던가 아빠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결과 내가 더욱 슬퍼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고난 성격의 차이인지, 자라온 환경의 문제인지, 내가 차마 터득하지 못한 어떤 기술의 결과인지 수없이 고민했던 그것이 다름 아닌 경험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솔직히, 다 그만둬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고 말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환영받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색한 미소와 무뚝뚝한 말투를 고치긴 어려워도 진심을 담기 위해 노력해볼 순 있었다. 그것은 여덟 번은 실패하고, 두 번쯤 성공하는 노력이었다. 무수한 실패 중에서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뼈아픈 실패는 3년도 더 지난 일이겠으나 아직도 생생하다. 분이 많은 생을 살아 잘 때마다 이를 가느라 이빨이 거의 남지 않은 아빠는 틀니를 하러 가자는 딸들의 간곡한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한사코 얼마 남지 않은 치아를 이용해 음식을 씹어 삼키며 함께 식사하는 동안 불편할 딸들의 마음을 가볍게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아빠의 고집을 꺾을 용기도, 인내도 없었던 나는 어느 날 고향에 가기 전 약국에 들렀다.


  “치아에 좋은 약이 뭐가 있나요?”


  병원이든 약국이든 넘친다고 할 만큼 충분한 정보량을 제공해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뜸 저렇게만 묻고 약사의 눈을 피했다. 아빠의 치아가 많이 빠져서요,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치과에 모시고 가라는 말이 돌아올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 말에는 분명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했냐는 질타가 섞여 있을 것 같아서, 고작 약국에 영양제를 사러 오는 것밖에 하지 못하냐는 생각을 저 선해 보이는 약사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약사가 추천해준 영양제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사들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짧았다. 어떤 말을 하면서 건네줄지를 고민했다. 아빠의 치아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나에게 직접 말했던가. 너무 자세히 아는 척하면 아빠가 무안하지 않을까. 적당히 모르는 척 몸에 좋은 거라며 쥐어줄까. 그러다 언니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이빨에 좋은 약 사간다.]


  신난 모양의 이모티콘이 답으로 왔다. 언니가 신난 부분이 아빠의 약 때문인지, 동생이 고향에 들른다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가지 이유가 모두 아니라면 아마도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향에 도착해서 터미널에 마중 나온 아빠의 트럭에 올라타 단 둘이 시골집에 향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하면서 건네줘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이 약이 아빠의 잇몸 통증을 없애주진 못할 테지만 내 마음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다.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한 저녁식사의 밥상 위에는 나를 환영하기 위한 삼겹살이 올라있었다. 엄마는 그 삼겹살을 뼈 없는 부분만 골라 비계와 살 부분이 적당히 섞이게 잘게 잘라 아빠 앞에 따로 덜어놓았다. 나는 그 잘게 잘린 삼겹살이 다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빠, 요새도 이빨 아프나?”


  아빠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멀거니 바라봤다. 이빨은 맨날 아프지, 대답은 아빠 대신 엄마한테서 들려왔다.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먹던 수저를 멈추고 잠시만!, 하며 건넛방으로 뛰어가 사들고 온 약을 챙겼다.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너무 어색하고 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다시 밥상 앞으로 돌아갔다.


  “이거 잇몸이랑 이빨에 좋은 영양제래. 챙겨 먹어라.”


  그 말을 뱉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퉁명스러운 투로 얘기할 게 아닌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툭, 바닥에 놓아둘 게 아닌데. 어떤 마음으로, 어떤 약국에 가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사온 약인지, 무엇보다 그 약을 먹고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는지 등의 이야기를 죄다 빼먹었다. 나는 다른 말을 더 덧붙일 수 없었고,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해진 공기를 깨고 언니와 엄마만 매일 챙겨 먹어야겠네, 는 등의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남은 삼겹살들을 입에 구겨 넣으면서 생각했다. 대실패로구나. 그리고 슬며시 약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TV만 바라보며 밥을 씹어 넘기는 아빠를 바라봤다. 그러자 또다시 조금 슬퍼졌던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지금과 어쩌면 미래가 한꺼번에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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