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이 고깃집이었던 그 원룸은 내가 살아본 방 중에서 가장 넓었다. 매트리스가 하나 깔려 있고, 옷장과 행거 등 있어야 하는 물건은 다 있었는데도 그랬다. 적당한 높이의 상자에 또 다른 상자를 납작하게 펴 만든 밥상을 가운데 두고 친구들과 여럿이서 둘러앉아도 그럭저럭 공간이 남았다. 공간과 비례하는 가스비가 걱정스럽긴 했지만 일단 넓으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방 하나에 살림살이가 다 들어가는 원룸은 그래도 주방과 일체형이냐 아니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 이 사실을 몸소 느끼게 해 준 것도 그 커다란 원룸이다. 침대가 있는 공간과 주방을 가르는 얇은 벽 하나가 이불의 냄새를 다르게 하고, 옷의 냄새를 다르게 한다. 그것은 나의 냄새를 지켜내는 문제이고 생각보다 존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원룸은 냄새를 빼앗겨야만 하는 쪽에 속했다. 방 하나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와 냉장고와 매트리스와 화장대와 옷장이 다 들어있었다. 그래서 생선 비슷한 것을 구워 먹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고 햄이라도 구워 먹으면 기름 냄새가 나는 이불속에서 잠들어야 했다. 어느 날 빼앗긴 냄새 때문에 올리브영에 들려 유행하는 섬유 향수를 사면서 담담히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쩐지 방이 크더라니. 그렇게 대학가 넓은 평수 원룸의 월세가 25만 원 밖에 하지 않는 이유를 점점 잃어가는 나의 냄새와 맞바꿔 알게 되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흔한 진리를 깨달은 것 치고, 그때의 나는 무려 자취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혼자 사는 것에 능숙해졌다는 착각이 드는 시기였다.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으나 아무것도 몰랐던 때에 비하면 꾀가 생겼다고 할까. 약간의 우쭐함을 가져다준 그런 생각은 주로 마늘과 대파 따위에서 출발했다. 나이가 들기 시작하니 마늘이나 대파, 청양고추 등은 훌륭한 조미료가 되어주었다. 그 전에는 다된 음식에 들어있어도 빼고 먹기 바빴던 그것들이 갑자기 맛있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거쳤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 어른의 채소들은 간편하게 식사의 즐거움을 올려주었다. 전처럼 똑같이 계란에 간장을 넣어 비벼먹어도, 청양고추나 마늘을 넣으면 훨씬 그럴싸한 식사가 되었다. 분명 똑같은 라면인데 대파를 넣으면 요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마늘과 대파를 한가득 사온 다음 한참 동안 손질해서 냉동실에 넣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마늘을 빻거나 편 썰은 것 두 종류로 나눠서 보관하고, 대파는 잘게 썰어 지퍼백에 담았다. 시간과 여유가 없어 있는 대로, 되는 대로, 가능한 대로 때우던 이전의 끼니들에 비하면 얼마나 능숙해진 식사인가.
그것들의 맛도 맛이지만, 나는 그렇게 아무 데나 마늘과 대파를 넣어 먹는 나 자신의 행위에 도취되어 있었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주로 마늘과 대파, 기분이 내키면 청양고추를 산다. 청양고추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한번 얼리면 맛이 덜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내킬 때만 산다. 장 봐온 것들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와 하나씩 풀러 본다. 먼저 대파부터 손질한다.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 대파를 도마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썰기 시작한다. 서투른 칼질이지만 괜히 딱, 딱, 딱 어디선가 들어본 빠른 리듬을 흉내 내려고 애써본다. 다 썰어서 지퍼백에 담은 다음 냉동실에 정리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 과정은 마늘을 손질해 넣는 것까지 이어지고, 나는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들떠 있다.
그렇게 능숙한 삶의 증거를 양손 가득 쥐고 온 날이 있었다. 2킬로짜리 생마늘을 모두 빻거나 편 썰어 냉동실에 넣어 둘 요량이었다. 싱크대 쪽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마늘을 빻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시작했던 마늘 빻기가 30분이 넘게 이어지자 아무런 일이 되기 시작했다. 눈이 매워지는 것은 둘째치고 손 끝에 매운맛이 배어들어 아려왔다. 요리를 흉내 내는 마약 같은 행위의 도취가 지속력이 짧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어느새 노동이 되어버린 마늘 빻기는 그 후로도 몇십 분 가량 더 이어졌다. 변변치 않은 다이소 1천 원짜리 플라스틱 도마 때문에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 같아 괜히 짜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날 밤 잠에 들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노동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해가 다시 뜰 때까지 조금도 잠들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진 몽롱한 각성 상태에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방 안에 온통 마늘 냄새가 가득했다. 심지어 방금 막 씻고 나온 내 코 끝과 손 끝에서도. 매운 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서 아린 손 끝을 코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기력 회복에 좋다거나 정력에 좋다거나 온갖 기운을 차리는 데 좋다던 마늘의 효과를 떠올려보며 확신했다. 잠 못 들었던 밤은 마늘 냄새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고. 혹은 내 냄새를 지켜주지 못한 벽의 부재 때문이라던가.
나의 냄새를 잃어버렸던 그 방과 마늘 냄새로 잠들지 못했던 밤이 다시 떠오른 것은 고향 집에서 아침을 맞았을 때였다. 모두가 나를 배려하는 것이 분명한 조심스러운 소음들에도 불구하고 눈이 일찍 떠졌다. 나 외의 다른 존재가 있는 공간에서의 숙면은 낯선 만큼 아직 갈 길이 멀다. 항암치료로 인해 기력이 쇠한 엄마 대신 언니가 간단한 식사를 준비한다. 그릇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간혹 들리는 싱크대의 물소리, 그런 소리들을 벽 너머로 느끼면서 누워있었다. 기억하려고 애써 보면서. 저런 소리들을 또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엄마 아빠가 주방 바닥에 마주 앉아 믹스커피를 타마시던 소리들. 낮은 목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왔고 커피를 후후 불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다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대화의 소리들. 행복하기보다 절망스러워 어린 나를 일찍 자라게 했던 가난의 대화들. 그런데도 벽 너머로 그 대화를 듣던 순간들을 그리워한 스스로를 깨닫는 것은 무척이나 눈물겨워지는 일이었다.
존재의 상실을 다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벽의 부재도, 마늘이나 대파 따위도 아니다. 알면서도 몰랐던 사실들을 한참이나 지나고 난 뒤에 인식한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하면서도 중요한 일인가. 나를 들뜨게 한 것이 요리를 흉내 내는 근사한 기분이 아니라 그리운 일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일인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에 대해 누구나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그리움을 느끼는 순간 같은. 얼른 언니를 도와주러 나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이런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줄을 알게 된 사람은 종종 이렇게 발버둥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