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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Jan 13. 2019

기말고사 마지막 시간은 닭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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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이란 시험은 어김없이 계속 돌아오고 여유로운 시간은 허겁지겁 사라지는 날들이었다. 중간고사가 엊그제 끝난 기분인데 곧바로 기말고사가 다가오니, 그 사이사이 자잘한 쪽지 시험이며 모의고사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겠다.


하지만 제일 길고 지루했던 것은 역시 기말고사였다. 이제 이 것만 보면 한 학기가 또 나름의 끝을 맺는데, 이 놈의 시험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1-2 과목씩 치는 시험은 일주일 내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가늘고 길게 계속되었다.


나는 3년 내내 평소에는 공부를 내일의 나에게 미뤄가며 느긋하다가, 시험 직전 일주일에 벼락처럼 몰아치는 미련한 짓을 어리석게 반복했다. 다음부터는 평소에 조금씩 해둬야지, 다짐해보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내일의 나부터 찾았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허둥지둥 시험에 매달리는 일주일 전부터는 다음 주에 볼 시험 과목이 하루에 2과목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결국 시험 전날이나 돼서야 전에 없는 집중력을 발휘할 거면서, 이런 부질없는 위안으로 평정심을 되찾곤 했다.


하지만 결국 시험이 시작되버리면, 장장 5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시험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시험기간에는 그날 치른 시험의 결과에 따라 그 기분을 고스란히 안고 하교를 한다. 점심도 먹지 않고 이른 하교를 하는 그 기간에는 유난히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따스했다. 그 쨍한 햇볕 속에서, 시험을 잘 본 사람은 그 볕과 같은 밝고 경쾌함으로, 못 본 사람은 그에 대비되게 더욱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집에 돌아오면 대부분의 경우, 낮에 이런저런 일들을 보시는 엄마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그럼 나는 평소와 달리 휑한 집에서 혼자 점심을 차려먹고 조금 쉬려고 해봤다. 하지만 시험 기간에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쉬는 것조차 어딘지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책상에 앉는다고 공부가 잘되는 것도 아니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올라오고 내가 보지 않은 부분에서 나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덜컥 겁이 난다. 하지만 그래도, 시험기간이기에 하루 종일 책상에 붙어 앉아 내일 있을 시험 걱정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책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렇듯 하루하루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느새 시험 마지막 날 아침이 된다. 그 날 아침은, 이번 기말고사의 결과야 어찌 되든 내 마음은 홀가분하기만 하다. 오늘이 끝이라는 사실, 더 이상 불안감에 얽힌 시간들을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상쾌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지막까지 열심히 OMR카드에 마킹을 한다.


하지만 시험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기말고사 마지막 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단 모든 시험을 마치고 나면, 나와 친구들은 더없이 신나는 기분으로 재잘대며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제 몇 달 간은 이 지긋지긋한 시험에서 해방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동네의 작은 번화가까지 20분 남짓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겨우 책 두권이나 들어있을까 말까 한 깃털 같은 가방을 메고 뭘 먹을지, 밥을 먹고 나면 뭘 하고 놀지 열심히 떠들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먹을 메뉴는 하나로 귀결됐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wneh&logNo=221276844589


도대체 닭갈비를 먹지 않을 때는 무얼 먹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험 끝난 날 우리의 점심 메뉴는 당연스럽게도 닭갈비였다. 만만한 가격 때문이었는지, 매콤한 닭갈비에 톡 쏘는 사이다 한 잔이면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닭갈비집으로 몰려갔다. 번화가에는 닭갈비집이 많았지만, 우리는 어디가 맛있고 싼 지 귀신같이 알았다. 가는 집은 정해져 있었고, 아주머니도 교복을 입고 우르르 들어오는 우리를 익숙하게 맞아주셨다.


일단 자리에 앉으면 인원수대로 주문한 닭갈비가 양념과 함께 철판 위에 올라가고 아주머니는 너무 높아 담처럼 보이는 둥근 스테인리스 판으로 철판 주위를 둘러주셨다. 아주머니는 재빠르게 닭갈비를 볶아 주시고, 우리는 그동안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닭갈비만 쳐다봤다. 이윽고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멈추고 이제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면 그때부터가 바로 진짜 기말고사의 마지막 시간이다.


우리는 각자 교복 위에 앞치마를 걸치고, 접시에 덜어가며 닭갈비를 먹기 시작한다. 살짝 매콤하면서 단 맛은 빼놓지 않은 닭갈비에 양념에 버무려진 떡도 먹어주고, 함께 볶아진 감자도 통과의례처럼 계속 먹다 보면 어느새 철판 가득했던 닭갈비가 사라진다. 여기까지 먹었으면 이제 진정한 피날레가 남아있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km00324&logNo=221133445870


바로 남은 양념에 볶아주시는 볶음밥! 역시 인원수대로 볶음밥을 주문하고 치즈는 꼭 추가한다. 아주머니가 다시 오셔서 이번에도 신명나게 밥을 볶아주시고 나면, 우리는 닭갈비보다도 더 맛있게 밥을 떠먹는다. 매콤한 양념이 그대로 스며든 고슬고슬한 밥에 쭉쭉 늘어나는 고소한 치즈를  곁들여 먹으면 그제야 만족스러울 정도로 배가 차고, 왁자지껄했던 우리의 식사도 끝이 났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면, 그제야 시험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제 우리는 최소 단 몇 시간은 자유의 몸이고, 무엇을 하고 놀든 최고로 신나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기분에 사로잡히지만 우리는 저번 중간고사에도 했고, 저저번 기말고사에도 했던 그 코스를 지치지도 않고 다시 밟는다.


스티커 사진을 찍고 노래방을 갔다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또는 노래방을 갔다가 스티커 사진을 찍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뭔가 바뀐 것 같지만 하나도 바뀌지 않은 예의 그 일들을 한 후, 잘 놀았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흐뭇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연했던 일상들도, 고3이 되어 입시에 바빠지는 시기가 되니 점점 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났어도 더 큰 시험을 코 앞에 두고 있던 우리들은 그냥 학교 앞에서 나중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고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런 일을 몇 번 더 반복한 후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이었던 수능을 치렀고, 자주 보자고 눈물 흘리며 결국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늘 함께했던 기말고사의 마지막 시간들이었지만, 이제 우리가 함께 보는 날은 일 년에 한두 번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의식처럼 닭갈비집으로 향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스무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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