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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번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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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Jan 10. 2019

홈메이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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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여름. 공기는 점점 뜨거워져 끈적한 습기마저 머금고, 베란다 앞 목련나무는 꽃피우던 시절을 잊은 듯 푸른 잎을 무성히 늘려나가고, 어디서든 끈기 있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할 ㅇㅇ아파트의 203동 203호. 길을 잃어도 어디서든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던 나의 유년 시절 그 집에서는, 몇 번이고 났던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선 베란다 문을 있는 힘껏 끝까지 활짝 열고, 조용히 분주하게 목을 돌리는 선풍기를 튼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수박이며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들고 와 베란다 문 바로 앞에 눕는 거다. 마지막으로 거실에 있는 전축을 틀고 한결 시원해진 기분으로 엄마가 즐겨 듣던 라디오를 함께 흘려들으면, 그때야말로 여름의 최고조였다


한가로이 누워서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이상스럽게도 빈번하게 '마법의 성'이었다. 나는 그저 거실 바닥에 한껏 편한 자세로 몸을 뉘었을 뿐인데 그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누빌 수 있었으니, 그 공간이 나에게는 마법의 성 그 자체였던 셈이다. 여름이면 휴가 철마다 습관처럼 갔던 어느 바다보다도, 내게는 그 여름의 우리 집 바닥이 더 소중했다. 그야말로 홈메이드 여름이었다. 


홈메이드 여름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면 찬장 깊은 곳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드러내곤 했던 가정용 빙수기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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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여름 나기는 조그만 연녹색 빙수기를 꺼내어 꼼꼼히 먼지를 닦고, 팥 통조림이며 딸기 시럽이며 빙수용 떡과 젤리를 사 두는 데서부터 시작이었다. 겨우내, 아니 여름을 제외하면 쓸 일도 없는 유리그릇들도 슬쩍 뒷줄에서 나와 제 위치를 찾아간다. 엄마는 빙수기로 얼음 가는 일조차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팔이 빠질 것 같다며 늘 몇 번이고 쉬면서도, 항상 유리그릇 가득 얼음이 쌓일 때까지 정성스레 손잡이를 돌려가며 얼음을 갈았다. 


https://www.pinterest.co.kr/pin/680395456179233403


그렇게 곱게 갈린 얼음이 차곡차곡 쌓여 앞에 놓이면, 그다음은 내 몫이었다. 오로지 나의 취향대로 토핑을 얹는 시간. 팥빙수에 팥이 빠지면 섭섭하니 통조림 팥을 적당히 얹고 좋아하는 떡 가득, 젤리 조금에 딸기 시럽을 작게 한 바퀴 둘러주면 완성이다. 사각사각 얼음을 씹으면 목뿐 아니라 가슴 언저리까지 화할 정도로 시원해지고 입 안에도 쫀득한 식감과 어딘지 모르게 투박한 단 맛이 꽉 차올랐다.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0105jaok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 가족이 더 즐겨먹었던 건, 다름 아닌 수박화채. 엄마는 또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도구들로 뚝딱뚝딱 동그랗게 예쁜 모양으로 수박을 파내고, 얼음을 띄워 만들었다. 화채를 먹는 방법은 너무나도 다양하지만, 나는 언제나 살구색 요구르트였다. 


그 고운 살구색에 수박의 발그레한 물이 퍼져나갈 때쯤이면, 이미 수박은 사라지고 없었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서둘러 요구르트를 마셔버리는 거였다. 여름이면 늘 즐겨 입던 나시 원피스를 입고 맞은편에 앉은 엄마는, 어딘지 모르게 지친 표정이지만 그래도 미소 지으며 잘도 먹네, 하는 거였다. 그렇게 푹푹 찌는 여름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던 한여름의 시원한 것들에는 어떤 의식 같은 구석이 있었다. 아, 여름을 보내는 중이구나, 싶은. 그래서 그것들의 기억은 이제 나에게 낡은 홈비디오를 되돌려보는 것 같은 기분을 남기고 만다. 베란다에 걸린 풍경을 건드리던 바람의 모양새, 거실 테이블에 올려둔 채 까딱이던 나의 조그만 발, 부채질을 하던 엄마의 손놀림, 달그락거리는 유리그릇 소리까지 모두 한꺼번에 재생되곤 한다. 


그래서 그 푸른 계절에 내가 먹었던 모든 것은, 홈메이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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