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학원 드라마와 함께한 중고딩 시절
중딩 때의 기억은 대체로 희미하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아직도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것에 비하면, 중딩 시절이 내 삶에서 가지는 존재감은 미약하다.
중학교 입학 전 치렀던 반 배정 고사에서 느닷없이 전교 1등을 차지한 것이 문제였다. 이후 3년간 치러진 여섯 번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윗분들'의 기대를 맞춰드리느라, 시험때만 되면 배탈이 도졌다. 얼른 시험지를 제출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과민성 대장염의 나날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나란 사람은 꽤나 내성적 관종이어서, 조용히 학원 다니는 사이사이 세탁소에 들러서 또래들처럼 교복도 줄이고(교복 조끼는 짧고 타이트하게 줄이고, 치마는 길게 단을 늘리는 것이 강북 지역의 유행이었다), 입술에는 빨간 틴트를 발랐다(선생님과 부모님이 입술색이 없어진다고 겁을 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행하던 앞머리를 내니 이마에 여드름이 자잘하게 돋아났다.
나는 항상 호르몬과 중간고사, 틴트, 작게 줄인 교복 사이에서 갑갑함을 느꼈다. 시들지는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찌들어 있었다. 남들 하는건 다 했고, 하지 말란 것도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재미없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친구들 손에 휴대폰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이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아빠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는데, 16만 화소 카메라폰 이라는 것이 등장하며 인싸 친구들은 하나둘씩 폰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중2때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지게 됐는데, 반에서는 약간 늦은 편이었다. 휴대폰으로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주고받고 하면서 중딩다운 재미가 살아났다. 문자와 전화는 늘 부족했지만, 집전화로 어느정도 아쉬움을 달랬다. 전화세 고지서가 나오면 엄마한테 하루이틀 깨지는 것만 각오하면. 통신으로 못 채운 친구들과의 교류는 버디버디와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채웠다.
그리고 휴대폰과 함께 또래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퍼져나가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 드라마와 영화들이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2000년대 이전과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상파TV에서는 일본의 영상이나 노래를 트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0년과 2004년 3, 4차 일본문화 개방으로 전에 없이 다양한 일본의 노래, 영화, 드라마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나의 사춘기는 이 거대한 조류를 정면으로 맞았다. 가수 보아의 일본 노래들은 즐겨듣고 있었지만, 일본인이 만든 일본 컨텐츠를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만화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 전에도 <러브레터>(1995)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1999년 9월의 2차 문화개방 영향인지 1999년 11월에 개봉) '오겡끼데스까?(잘 지내나요?)' 안 본 사람도, 초딩도 중딩도 '오겡끼데스까' 를 읊고 다닐 정도였다. 이후 소설로 베스트셀러였던 <냉정과 열정사이>(2001)등의 영화가 차례로 인기를 끌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감독은 독보적인 팬덤을 거느렸다다.(<4월 이야기>(1998), <하나와 앨리스>(2004))
매니악한 영역에 있었던 제이팝이나 일본 컨텐츠를 즐기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드라마 <고쿠센>(2002)으로 나와 또래 중딩들 사이에서 조용한 일본 드라마 붐이 시작됐다.
나의 베프는 이모가 '구워준' 고쿠센 드라마 CD들을 갖고 있었다. 당시 '초고속 인터넷'은 지금 기준으로 초저속이었기 때문에, 클럽박스에서 드라마 한편 다운받으려면 하룻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때문에 공CD에 영화나 드라마를 담은(구운) 자료는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 집에 가서 신라면을 하나 부숴먹으면서 <고쿠센>을 한 편씩 아껴서 보았다. 풋풋한 얼굴로 교복을 입은 마츠모토 준, 오구리 슌, 나리미야 히로키는 지금 기준으로도 '존잘'이었고 양쿠미 선생님으로 분한 나카마 유키에는 '존예'였다.
드라마에 흠뻑 빠진 아이들은 V6가 부른 OST인 <Feel your breeze>를 '소리바다' 같은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다운받아 뜻도 모르고 흥얼거렸다. 몇몇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2외국어 시간에 배운 히라가나, 카타카나로 일본어 가사를 더듬댔다.
일드는 신문물이었고, 쿨했다. 특유의 과장된 연출도 신기했고, 이국적인 얼굴의 배우들도 멋졌다. 학원과 학교 사이에서 지루했던 아이들이 빠질 만한 '무언가'였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꽃보다 남자>, <1리터의 눈물>, <태양의 노래>같은 일드와 일영들이 풍작이었다. 떡밥이 계속 생산됐기에 덕질도 멈추지 않았다. 내 아이리버 Mp3는 용량이 작아 노래를 신중하게 골라서 넣어야 했는데, 내가 고른 건 주로 에미넴, 팝송, 제이팝이었다. 3대 디바인 우타다 히카루,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의 노래가 아라시와 함께 mp3를 채웠다. 그땐 가요보다 제이팝이 더 낫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드라마계에 마츠모토 준이 있었다면, 영화계에는 아오이 유우가 있었다. 하얗고 청순한 이미지에 긴 머리로 해맑게 웃는 아오이 유우는 전에 없었던 'girl next door' 스타일의 연예인이었다. 엄청난 미인이 아니어도 예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배우. 또래 여자 아이들의 휴대폰 배경 사진은 아오이 유우 일색이었다. 우리나라 여자 연예인들도 아오이 유우 스타일을 대놓고 베낄 정도였다.
그렇게 일본문화의 인기가 잔잔하게 계속되던 2006년과 2007년, 빅뱅과 원더걸스가 데뷔했다. 그리고 Kpop과 한국문화는 조금씩, 하지만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태지가 은퇴할 때(1996년)는 너무 어렸고, HOT와 젝스키스의 시절에도 초딩이었지만, 빅뱅과 원더걸스는 가수와 비슷한 나이에서 제대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던 최초의 아티스트들이었다. (이미 동방신기가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국민적 인기라기보다는 팬덤이 강한 편이었다)
빅뱅의 <붉은 노을>, <거짓말>, 원더걸스의 <Tell me>가 가요 차트를 점령했다. 중고딩들의 mp3 지분도 빅뱅과 원더걸스로 가득 찼다.
신기하게도 그 즈음 제이팝은 다이시댄스를 위시한 시부야케이 이외에는 정체기가 시작됐다.(적어도 내 기준에는) 왠지 모르게 재미있는 일드도 적어진 시점이었다.
게다가 '가요'에서 '케이팝'이 된 한국 대중음악이 제이팝 이상의 수준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프리즌 브레이크>(2005)로 바야흐로 '미드'의 시대가 시작됐다.
나는 원더걸스 노래를 흥얼거리며 허둥지둥 수능을 쳤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교복을 벗고 나자, 교복입은 청춘물이 가득했던 일본 드라마의 존재감도 나의 삶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