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연애관계의 모양은 무엇이지요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 책을 보면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내가 주저 없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 그 단상들이 나의 어떤 사고 회로를 거쳐 나왔는지 무리없이 이해하는 사람과. 그럼 나는 어떤 모양의 관계를 원하는 거지? 나의 말에 그가 코멘트를 달고 그의 코멘트에 내가 코멘트를 달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를 산소처럼 먹고 사는 관계. 꼭 함께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함께 뉴스를 보면서 저녁을 먹고 네가 청소하면 내가 설거지할게, 같은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관계. 가끔은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나는 관계. 며칠은 따로 떨어져 지내다가도 곧 다시 만나야 할 의무를 지니는 관계. 의무라고 했다. 이건 독점인가? 아님 그저 우선순위인가? 관계에 한해서는 내가 그의 1순위가 되고 그가 나의 1순위가 되는 관계를 원한다. 인정하자. 하지만 이건 약속일 뿐이다. 지켜야 하는 약속. 그렇다면 나는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는 관계를 맺고 싶구나. 그리고 그 약속의 내용이란 연애하자, 일대일 연애를 하자, 나 말고 아무도 만나면 안 돼, 따위가 아니라 더 디테일한 약속이 될 것이다.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말하고 상대 또한 원하는 바를 내게 말하고 우리는 합의를 보고 약속을 할 것이다. 지리하고 고된 생활 속에서 '약속'을 한다는 건 그만큼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의미겠지. <나는 이 관계를 무엇보다 아낄 거야. 무엇보다 사랑할 거야. 하지만 너만 사랑할 수는 없어. 내겐 친밀하고 정서적인 관계들이 많이 있거든. 이건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너가 나 말고도 여타 관계들을 소중히 가꿔나가길 원해. 하지만 말야. 아주 만약에 긴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누구보다 너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내가 너한테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어. 너도 내게 그래주면 좋겠다. 우리 약속을 하자. 나는 우리가 손을 잡는 연인이자 함께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아플 때 서로를 돌봐주는 반려자이면 좋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약속을 할래? 남이 연애냐고 물으면 연애라고 하자. 물론 우리의 관계는 연애로 부를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풍성하지. 그 비밀은 우리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돼.> 여기까지가 내가 지금까지 결론내린, 내가 원하는 로맨틱-섹슈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으나 거친 생각으로는 앞뒤를 왔다갔다 횡단하는 느낌에 가깝다)한 관계다.
내가 원하는 연애관계에 특정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여성주의 <일다>에 기고된 글을 읽다가 폴리아모리(polyamory: 일부일처제와 일대일 독점적 연애관계에 비판적인 다자 연애)와 퀴어 플라토닉(queer platonic: 육체적 끌림 없이도 애정을 나누는 관계)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에이로맨틱(aromantic: 어떤 젠더에도 연정적 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성향) 개념에 대한 글도 있었다. 살펴보니 에이로맨틱은 에이섹슈얼(asexual: 어떤 젠더에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과도 구분되는 것 같았다. 연정적 끌림과 성적 끌림을 구분하는 것이 신기했고, 동시에 내 과거가 떠오르면서 나는 어떤 쪽에 기울어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하지만 답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나는 어떤 시기엔 에이로맨틱 쪽에 가까웠고, 또 다른 시기엔 에이섹슈얼처럼 느끼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시기도 그렇지만 상대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성적 지향도 성별도 연애관계도, 내겐 전부 깜깜한 블랙홀처럼 느껴진다. 한때 나를 무엇이라고 정의내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이성애 연애 중심적 세계에 대한 저항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네이밍 제스쳐였다. 이제는 이성애 관계는 물론이고 미디어와 사회에서 그려내는 일대일 독점 연애 관계의 정상적인 이미지에서 조금씩 해방되고 싶다.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과 연애해야 한다는 사고는 분명 다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과, 그것을 강요당하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나는 가능한 한, 잘게 분해하고 해체해본 뒤에 선택할 것이다. <데몰리션>의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가 아내가 죽은 뒤 집 안의 모든 기계들을 부수고 분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운전대를 잡고 바닥이 꺼질 것처럼 흐느꼈던 것과 같이.
** 이 글은 다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때문이다. 소설집 첫 단편 <봄밤>을 읽고 목끝까지 올라오는 이 애타는 마음을 누군가를 붙잡고 오래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나머지 그런 누군가를 간절히 염원하며 쓴 글임을 부정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