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의 『노동자, 쓰러지다』를 읽고
한 해 2,200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 그야말로 산재공화국. 한국 사회는 비용 절감의 이유로 일하는 사람의 안전을 외면한다. 그런데 노동자에게 안전은 곧 목숨이다. 즉 목숨 내놓고 일하라는 의미다. 별일 안 생기겠지, 알아서 조심하면 돼, 다 그렇게 일하는 거야,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렇게들 말한다. 그런데 정말 죽는다. 너무 많이 죽는다. 빠르게 죽는다. 하루 평균 6명이 죽는다. 4시간에 1명꼴이다. 이 정도면 우연한 위험이 아니다. 위험은 이미 계획되어 있다. 이쯤 되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다. 가해자가 없는, 아니 가해자가 너무 많은 살인.
『노동자, 쓰러지다』는 기록노동자 희정이 한국 사회의 아픈 민낯을 촘촘히 들여다보고 성실히 기록한 책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숨이 쏟아졌다. 머리가 아팠다. 앙상한 가지에 나뭇잎이 달려 자라듯이, 얄팍하게 알고 있던 내용에 자세한 정황들이 덧붙여졌다. 이토록 꼼꼼하면서도 동시에 잔인해서 괴로운 이야기들을 희정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채집했을까. 그가 여러 산업 현장들을 오가며 느꼈을 절망감과 무력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빽빽한 사실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담아내겠다는 결연한 다짐이 전해졌다. 정말로 웬만큼 굳은 결심 없이는 이 책을 끝까지 밀고 나가 집필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챕터가 바뀌어도 사고의 근본 원인과 그 메커니즘은 같았으나, 사고의 잔인함과 고통의 개별성은 똑바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쓰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담긴 당사자들의 고통은 각기 다르게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금방 지칠 수 있는 작업이 바로 『노동자, 쓰러지다』 집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희정의 마음을 따라가며 꾸역꾸역 읽었다. 작가의 용기에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책에는 다양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건설업부터 철도, 통신회사, 우체국, 택배, 유해물질을 다루는 노동자들을 거쳐 백화점, 마트 감정노동자들까지 넓은 직군의 노동자들이 같은 메커니즘 안에서 다치고 죽는다. 희정은 산재의 구조적 원인을 체계적으로 밝혀나가면서도 구술 인터뷰와 르포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현장감을 생생하게 살려 냈다.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동료도 입을 모아 노동자들의 삶을 아프게 증언하고 작가는 그 앞뒤로 사고의 메커니즘을 면밀히 분석한다. 사고의 메커니즘은 단연코 중층적 다단계 하청 구조*다. 하청의 하청의 … 하청 구조는 산업 분야와 상관없이 어느 직군에나 만연하다.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자, 일용직 노동 등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원청과 계약한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다. 하청은 생산 비용을 절감해야 원청과 계약할 수 있으니 가장 만만한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깎는다. 임금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안전교육이나 안전시설을 구비하지 않는다. 알아서 조심하라는 식이다. 이는 산재를 은폐하기에도 아주 편리한 구조다. 피해를 입은 노동자가 하청 소속이니 원청은 사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단계 하청 구조는 ‘위험의 외주화’라고도 불린다. 일감을 아래로 아래로 떠넘기듯, 위험도 함께 떠넘긴다. 피해자는 버젓이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드러나질 않으니 사고는 되풀이된다.
책을 읽는 동안 뇌와 심장에 과부하가 오는 것 같았다. 직군도 다르고 고통의 내용도 다르지만 같은 메커니즘 속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사고들을 접하며 마음도 함께 야비해져 갔다. 어차피 원인은 똑같은데 이렇게 많은 수치와 정황들을 자세히 알아야 하는 건가요, 작가에게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상식적으로 벌어지는 사고들을 텍스트로 접하는데도 몸이 답답하고 쑤셨다. 한동안 책을 덮고 읽지 못했다. 몸으로 겪어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글로도 접하기 버겁구나. 내 그릇이 이렇게 좁다며 자책했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KBS에서 방송된 <거리의 만찬: 하청 노동자 편>을 봤다. 고(故) 김용균 씨* 이야기가 나왔다. 그의 유품으로 남겨진 휴대폰 영상에는 그가 정장을 입고 수줍은 듯 춤을 추고 있었다. 울컥 눈물이 나왔다. 이어 3명의 MC가 산재 사고를 겪은 노동자와 그 가족을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꼭 『노동자, 쓰러지다』의 영상 버전 같았다. 코미디언이자 프로그램 MC인 박미선은 말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한테나 일어나지는 않는 일 같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말을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 <거리의 만찬: 도시가스 검침·점검원 편>을 시청한 뒤에 다시 『노동자, 쓰러지다』를 폈다. 그러고 나니 노동건강연대의 전수경 활동가가 책 서문에 이렇게 적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마세요.”
누구나 일하다 다칠 수 있지만, 누군가가 지나치게 더 많이 다친다. 사고의 원인과 과정이 산업 분야와 상관없이 중복된다면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다. 안전의 자리에 이윤이 들어선 시스템이 일하는 사람들을 죽인다. 두 달 전에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 사회는 사람이 죽어나가야만, 그 죽음이 만천하에 드러나야만 바뀐다는 어느 노동조합 활동가의 말에 쉽게 반박할 도리가 없다. 이번 김용균법도 노동자의 투쟁과 죽음이 반복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은 사람의 목숨과 제도의 변화를 ‘기브앤테이크’의 방식으로 맞바꿀 수 없다. 사고 후 대처 사례들은 지금까지의 데이터로도 충분하다. 아니, 이미 차고 넘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고 예방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장기간에 걸쳐 해내야 하는 일이겠지만,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사회적 감수성’을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없다면 키워야 한다). 이윤보다 사람, 성과보다 건강, 개인의 이익보다 함께 사는 공동체를 우선으로 두는 것이 바로 사회적 감수성이다. 이를 사람들이 속한 사회적 공간-가족, 학교, 직장, 병원 등-의 기본적인 대전제이자 원칙으로 우뚝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감수성=감성팔이’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 자체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감수성을 갖춘 개인은 많지만 정작 사회 현장에 나가면 이윤과 위계서열의 힘 때문에 대부분 그 감수성을 감추고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감수성을 키우면 사회 시스템을 들여다볼 이유와 동력, 그리고 그에 따른 차별과 아픔에 공감할 힘이 생긴다. 감수성 없이 시스템의 모순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는 불가능하다. 물론 사회 시스템을 하나하나 뜯어서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다(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심적인 스트레스를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해야 한다. 진상을 넘어선 진실을 드러내어 밝혀야 한다. 개입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변한다. 눈에 보일 정도의 대단한 변화는 아닐지 몰라도, 아주 서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답답하고 괴로워도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10번 출구 추모 현장에서 발견한 한 장의 포스트잇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안해요. 살아남았어요.” 나 또한 아직까지 운 좋게 살아남았다. 문득 지금 내 목숨 값은 얼마로 계산될까 궁금해진다. 꼭 나 대신 죽은 것만 같은 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수많은 여성과 노동자 분들에게, 그리고 3년 전 이맘때쯤 사다리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난 선배에게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 김중일 시인의 시로 갈음한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면
바다의 수위는 얼마나 올라갈까
세상의 어느 낮은 섬 외진 모서리부터 차례로 잠길까
선잠 위로 차오르는 바다의 수위가
구름까지 닿으면 구름이 철썩철썩 파도처럼 부서질까
필요 이상으로 구름은 또 얼마나 많이 피어나
지구를 빈틈없이 모두 뒤덮고도 남아 우주로 새어나갈까
난민촌 밥 짓는 연기처럼 모락모락 새어나갈까
우주 밖으로 백기처럼 휘날릴까
구겨진 백지처럼 버려질까
지구상의 사람 누구든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
방금도 일어난 잔혹하고 끔찍하며 슬픈 일이 우리 모두에게
단 한번만 공평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 누구에 의해서든
두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김중일, 「농담」 , 『내가 살아갈 사람』
* 발주자-도급자-하도급자-재하청-오야지-십장-일용직 노동자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 원청업체가 외주화, 즉 하도급을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비용 절감인데, 다수의 하청업체들은 치열하게 경쟁을 하면서 저가의 하도급대금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하청업체는 적정 수준에 미치지 않는 하도급대금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안전시설 설치 등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게 되고, 하청 노동자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산재와 다단계 하도급, ‘위험의 외주화’」, 오빛나라, 베이비타임즈, 2018.9.27.)
*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운송설비 점검을 하다가 사고로 숨졌다.
* 유해·위험 작업의 사내 도급을 원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10억 원 이하의 과징금 부과, 사망 사고 발생 시 안전책임자뿐 아니라 회사에도 함께 부과하는 벌금의 상한선을 10억 원으로 상향, 법의 보호 대상을 종전의 '근로자'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하는 등 위험의 외주화를 줄이는 조항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법안 시행 과정에서 기업과 사용자들의 항의로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안은 채로 시행되었다는 비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