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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Feb 07. 2019

우리가 아픈 진짜 이유: 진짜 질병은 불평등이다

: 리처드 윌킨슨의 『평등해야 건강하다』를 읽고




  사람들 사이에서 안부와 걱정, 그리고 격려 차원에서 종종 오가는 말이 있다. “밥 잘 먹고 다녀야 돼. 잠 잘 자는 게 최고야.” 아마도 건강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면, 건강해진다는 이야기다. 물론 맞는 이야기다. 우리는 정기적인 간격으로 밥을 챙겨먹어야 몸에 영양분을 채우고, 질 좋은 수면을 통해 체력을 보충할 수 있다. 우리는 또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한다. 운동을 해야 몸에 쌓인 지방을 배출하고 근육을 키울 수 있다. 이뿐이랴, 운동을 하면 육체가 피로해져서 잠도 잘 온다고 한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운동 꾸준히 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옳은 명제다. 나아가 충분한 밥과 잠과 운동을 통해 몸 건강을 챙기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체력이 생기니, 열심히 일해 돈 잘 벌어서 궁극적으로는 광명 찾고 행복 찾을 수 있다는 깔끔하고 긍정적인 결론도 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하고 깔끔한 명제에는 허점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사회 구조와 사회적 관계에서 찾는 학문이 바로 사회역학이다. 저명한 사회역학 연구자인 리처드 윌킨슨은 다양한 연구 결과와 통계 데이터를 인용하며 현대 사회에서 건강이 악화되는 이유에 물리적 환경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가령 열악한 주거 환경, 보잘것없는 식사, 흡연, 대기 오염, 운동 부족 등이 건강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은 이제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역학자라면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열악한 집에서 사는 사람은 그저 그 집의 지저분한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일까요?’ 그리고 사회역학자 중에서도 리처드 윌킨슨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열악한 집에서 산다는 사실 때문에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상대적 박탈감이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칩니다.’ 이 대답은 어쩌면 윌킨슨이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다.


  윌킨슨은 질병을 발생시키는 ‘심리사회적(psychosocial)’ 요인들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심리사회적 요인으로 3가지를 꼽는다. 낮은 사회적 지위, 열악한 사회적 관계(친분관계), 초기 아동기의 경험이 그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한다. 이것이 윌킨슨이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기본 전제다. 우리는 타인이 가졌으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상대와 나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불안감’이라는 감정 또한 인간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생긴다.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한, 이러한 끊임없는 돌아보기, 즉 성찰성(flexibility)이 인간의 피부 아래로 침투해 건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소위 ‘힘 있는 자’가 이기는 위계서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아프다. 질병의 원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복합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현대 사회는 명백한 위계서열 사회이며, 경쟁을 통해 높은 지위를 획득할수록 더 많은 재화를 얻는 자본주의 사회이기도 하다. 윌킨슨은 심리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힘주어 설명하면서도, 심리사회적 요인을 결정하는 것은 ‘물질적 조건’임을 명확히 한다. 여기서 물질적 조건이란 소득 또는 지위 불평등을 말한다. 소득 격차로 대표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다만 건강 불평등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물질적 요인과 질병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심리사회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가령 ‘고용 불안정’이라는 물질적 상태가 심장병을 일으킨다면, 그 사이에는 노동자의 ‘만성 불안감’이라는 심리사회적 스트레스가 숨겨져 있다. 또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 현대 사회는 상대적 빈곤 사회다. 19세기의 공중보건운동과 상하수도 건설, 산업화 이후의 소득 증가 등을 통해 사람들은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평균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가난한 국가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절대적 소득 수준보다 내 주변 사람의 소득 수준과 비교한 상대적 소득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미국의 흑인 남성 건강과 코스타리카 남성 건강을 비교했을 때 흑인 소득이 코스타리카 남성 소득보다 더 높았지만, 흑인의 수명이 더 짧았다. 이는 흑인 남성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사람들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그러니 절대적 소득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한 소득 분배’다. 궁극적으로는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이 건강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윌킨슨은 2장부터 4장까지 물질적 조건이 심리사회적 위험 요인들을 거쳐 건강을 위협한다는 명제를 다양한 그래프와 표를 통해 증명한다. 5장부터는 소득 불평등과 폭력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불평등할수록 폭력이 많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보인다. 폭력은 빈민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데, 낮은 지위에서 오는 존중의 상실이 종종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6장에서는 불평등할수록 사회적 관계(친분 관계)의 관계가 왜 반비례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어 7장은 불평등할수록 젠더 차별과 인종주의 또한 높아진다는 내용이다. 특히 ‘자전거 타기 반응’을 통해 남성은 여성을, 백인은 타 인종을 무시하고 괴롭힌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8장이 가장 재미있고 인상 깊었는데, 애초에 우리가 왜 위계서열 사회에서 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원의 희소성과 보상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적으로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장류 중 인간에게만 있는 진화론적 특성을 언급함으로써 윌킨슨은 인간의 진정한 사회성은 협력과 호혜이며 인간은 평등주의적이고 친화적인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 장인 9장에서 윌킨슨은 앞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다시 요약하며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3가지 가치를 천명한다. 평등, 자유, 우애가 그것이다. 물론 사회·경제적 평등이 자유와 우애의 전제 조건임은 당연하다. 윌킨슨은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으로 종업원 지주제와 협동조합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한 평등 사회임을 강조한다.


  옮긴이 후기까지 읽고 책을 덮으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저자와 옮긴이, 그리고 편집자의 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완결성 있는 책이 탄생했구나, 하는 존경의 마음이었다. 책 뒷부분에서 김홍수영이 윌킨슨과 나눈 대화를 읽을 때는 윌킨슨의 논지를 한국 사회로 대입했을 때 좀처럼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조금은 풀리기도 했다.


  전부터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에서야 구체적인 논의들을 접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윌킨슨이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의 학자가 인문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학계의 연구들을 끌어오며 자신의 논지를 차근차근, 끈질기게 풀어나가는 과정은 일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지점은 역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윌킨슨의 핵심 논지를 살펴보자. 불평등은 열악한 사회적 관계를 일으킨다. 열악한 사회적 관계는 인간의 건강에 치명적이다. 그러니 근본 원인인 불평등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불평등은 애초에 왜 생겼는가? 선사 시대부터 희소한 자원에 대한 접근 격차가 생기면서 사람들 사이에 위계서열이 생겼다. 봉건 사회를 거쳐 계급이 뚜렷해지고, 산업화 이후 본격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오며 절대 소득이 올랐으나 계층 사이의 소득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윌킨슨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환경에 따라 지배 전략과 친화 전략 중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데, 소득 불평등이 심한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지배 전략을 강제로 권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대안이 다소 단순하고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종업원 지주제와 협동조합과 같은 대안들이 인간에게 본래 상호 친화적인 본성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킨슨은 이미 물질적 상태(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고 전제했다. 즉 인간 내면에 있는 선함과 협동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애초에 계급-계층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윌킨슨이 유토피아란 없고 완벽한 평등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우리는 돈과 지위로 타인의 인정과 나의 행복까지 구매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아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 종업원 지주제와 같은 정책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한 제도다. 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종업원 지주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얼마나 지난할까. 물론 ‘맥락 효과’에 따라 불평등한 사회는 빈민뿐 아니라 계층 전체를 불행하고 병들게 한다. 그러니 윌킨슨도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모두가(99%) 아플 수밖에 없다’는 연구 결과들을 인용한 것일 테다. 종업원 지주제나 협동조합, 보편적 복지, 부자증세 등 다양한 경제 민주주의 정책들이 실현되기 위해서 사회역학 연구자들이 할 일이 참 많다. ‘내가 아프면 타인도 아프고, 내가 건강하면 타인도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이터가 축적된다면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까. 윌킨슨이 애써 구축해놓은 연구 궤적은 적어도 나와 내 친구들의 아픔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해준다. 내 아픔은 내 탓이 아니라고 위로해 준다. 그러다 보면 나와 똑같이 아픈 사람에게도 시선을 두는 여유가 생긴다. 세계란 모두가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고통이 다른 고통을 응시하는 곳. 옮긴이가 인용한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나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아픔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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