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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Jan 31. 2017

감정이입에 관하여

  “지금 이 시대를 견디는 요령 중 하나는 매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아파도 위로를 구하지 않으며, 남의 고통도 모른 척한다. 내가 당하는 모욕과 상처, 타인의 호소, 분노와 절망의 세상사에 반응하다가는 열사(열받아 죽음, 熱死)하기 십상이다. 반응은 용감하지만 두렵고 책임져야 하는 삶이다. 사람들은 “잊어라”, “신경 쓰지 마라”, “티브이 채널을 돌려라” 하며 공모한다. 매일 “모른 척” 여부를 놓고 씨름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고통에는 목적이 있음을. 고통이 없다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151쪽).

                                                                  (중략)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야 타인의 현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시각적이다. 단어의 어근 ‘path’는 그리스어에서 열정이나 괴로움을 뜻한다. 비애, 병리학, 동정 같은 단어의 어원이 모두 같다. 감정이 ‘오솔길’을 뜻하는 고대 영어 ‘path’와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은 우연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이입은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면서 그곳에 가보고 싶은 욕망의 여정이다(296쪽).


- 감정이입 / 한겨레 칼럼 <정희진의 어떤 메모> 중에서.

칼럼 전문: http://hani.co.kr/arti/opinion/column/755388.html


잔인한 사건들에 대한 기사나 사진을 보는 게 어려워졌다. 살인사건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일절 피한다. 폭력이나 살해사건을 다룬 미디어는 내게 모두 위협이다. 터치스크린을 넘기다가 사진에 흉기나 피가 약간만 보여도 심장이 쿵 떨어진다. 후다닥 화면을 끈다. 올해 상반기에 소수자와 약자를 겨냥한 폭력 사건이 많았다. 더 힘을 내고 단단해져도 모자랄 판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무섭고 아파서 그랬다. 


한편으로는 내 감정이입 능력을 탓했다.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나도 약자지만, 나와 같은 소수자의 삶에 놓여 있는 친구들보다 내가 더 깊게 상처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리적으로는 잠에 들지 못하고, 아침에 몸을 씻는 시간이 힘들어졌다. 최대의 고비는 깜깜한 밤이었다. 해가 지고 집이 어두워지면 온갖 기이하고 잔인한 사건이 벌어졌다. 내 머릿속에서. 주변인이 주변인을, 내가 주변인을, 주변인이 나를 죽였다.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오래 갔고, 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내게 고통은 위험이었다. 


오늘 오전, 정희진의 칼럼을 읽었다. 물론 정희진 칼럼과는 결이 좀 다른 얘기다. 하지만 위로를 받았다. 내 고통에도 목적이 있을까. 내게 고통은 곧 위험이었는데, 정희진은(혹은 리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은) 고통이 없을 때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말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앞으로 내게 닥칠 수 있는 고통을 방어하는 데 무심해진다는 말일까. 또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불행에 무감각해진다는 말일까. 그렇게 세상의 고통에 고통스러워함으로써 그 감정을 돌보지 않으면 도리어 앞으로 겪게 될 위험에 무방비해진다는 말일까. 잘은 모르겠다. 내 고통에 목적이 있다면 나는 고개 숙이고 그 고통에 시간을 내주어야 할까. 아니다. 정희진도 말했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피했다. 생각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죽어가는 엄마의 이야기.” 


생각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에서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고통에 목적이 있다는 말(말장난 같은 면이 있어서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소용없는 말이겠지만)이 좋다. 좋은 말이다. 나는 내 고통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차라리 고맙다. 타인 아닌 타인들의 불행에 마음을 써 주어서 고맙다. 그렇게 애써서 슬퍼해주니 갸륵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못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하기 너무 힙겹고 괴로울 때는 놓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겸연쩍은 말이지만, 이미 목적을 채운 고통도 있는 법이니까. 궁금하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성 폭력을 연구하는 일로 보내는 정희진도 엄마와 딸, 죽어가는 엄마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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