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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Feb 05. 2017

『외딴방』에 대한 단평


 신경숙의 표절 사태를 논외로 한다면, 『외딴방』은 나의 시선을 ‘인문학’에서 ‘문학’으로까지 옮겨가게 한 도화선의 역할을 한 책이다. 유신 시대의 저임금, 해고, 파업과 같은 사회 문제들은 『외딴방』과 같은 훌륭한 문학 작품을 통해 ‘개별적인 삶의 서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만큼 명료한 말도 없다. 『외딴방』을 읽고 난 후의 나는 ‘문학’만큼 삶의 진실을 잘 표현하는 통로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된 두 가지 줄기는 다음과 같다. 유신 말기에 주인공인 ‘나’가 구로공단에서 일을 하며 동시에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던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형’으로 써내려간 것,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현재의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써내려간 것. ‘나’는 당시 공단에서 일을 하며 외사촌과 큰오빠와 함께 가리봉동역 앞 외딴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나 작가가 된 ‘나’는, 외딴방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괴로워한다. 70-80년대 구로공단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서부터 외딴방이 있던 건물에 함께 살았던 희재언니의 죽음까지, 그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작가에게 간단치 않은 고통이었다. 희재언니가 자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그녀의 방문을 열쇠로 잠갔던 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은 본인에게 평생의 장애와도 같았으니까. 실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작가의 신분인 ‘나’는 ‘사실적으로 글로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끈질기게 이어나간다. 그리고 ‘나’가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적인 경험들을 어떻게(혹은 얼마나) 글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문학이 시대적 현실(문학 바깥)에 얼마만큼 의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도 이어지게 된다.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넣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가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글을 쓸수록 문학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느낀다. 희망이 내 속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나 또한 희망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면 나로서도 행복하겠다. 문학은 삶의 문제에 뿌리를 두게 되어있고, 삶의 문제는 옳은 것과 희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과 불행에 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희망 없는 불행 속에 놓여 있어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질 않은가. (p.67)


정리는 역사가 하고 정의는 사회가 내린다. 정리할수록 그 단정함 속에 진실은 감춰진다. 대부분의 진실은 정의된 것 이면에 살고 있겠지. 문학은 정리와 정의 그 뒤쪽에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결되지 않는 것들 속에. 뒤쪽의 약한 자, 머뭇거리는 자들을 위해, 정리되고 정의된 것을 헝클어서 새로이 흐르게 하기가 문학인지도 모른다, 고 생각해본다. 다시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말이다. (p.73)


  『외딴방』은 ‘나’의 치열한 고민에 힘입어 결국 문학의 안과 바깥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글로 탄생했다. ‘나’, 아니 신경숙은 차라리 둘 사이의 틈새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희재언니의 죽음이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구로공단의 구조적 현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형상으로 묘사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 개인의 주관적인 삶과 시대적 현실 중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문학적 서사가 오히려 삶의 진실을 한없이 가깝게 데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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