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ompebble Jan 31. 2017

‘불행의 단독성’ 발견하기

『백(百)의 그림자』를 『백(白)의 그림자』로 읽는다는 것


-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한가. 삶의 힘든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떠올린 질문이다. 물론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기를 쓰고 그 힘든 순간들을 버텨낸 후에는 또 다른 형태의 고난이 찾아왔다. 불행이 찾아왔다고 해서 그 이후에 행복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불행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연속적으로, 덩어리째 내 몸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를 좀처럼 봐주려 들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질수록 울며 겨자 먹기로 결심하곤 했다. 이 녀석에게 일말의 배려도 기대하지 말자.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어차피 불행이라는 녀석에겐 이성이나 감정이란 것이 없었다. 그래도 버텼다. 살기 위해 버틴 것이 아니라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버텼다. 삶의 의지가 아니라, 탈(脫)고통의 의지였다. 불안으로 점철된 불면의 밤을 지나고, 퀭한 눈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침대에 눕기 전엔 술을 청했다. 그렇게 그 무엇으로부터의 연민도, 배려도, 구원도 없었던 나날들을 지났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한가. 이건 더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절망의 완전한 밑바닥에 다다랐을 때는 그 무엇보다 절실한 질문이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다. 왜 나인가. 왜 하필 나인가. 나는 이 지구의 유일한 패배자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정신 질환이 그 누구의 몸도 아닌 바로 내 몸에 달라붙었다. 꿈틀대는 벌레마냥 매일같이 내 머릿속을 파먹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생각했다. 아무도 내가 느껴 본 고통의 질감을 느껴 보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나는 한결같이 비아냥댔다. 너희들은 절대 몰라. 앞으로도 모를 거야. 


“하지만 너만 그렇게 힘든 건 아니야.” 여기저기서 말해주었다. 모두가 힘들어. 모두가 힘들지만 버티면서 살고 있어. 그들이 쉽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외려 사실을 말했다고 해야 옳다. 


그리고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백의 그림자』또한 도처에 널려 있는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남녀 주인공인 무재와 은교, 곧 철거될 전자상가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는 여 씨 아저씨, 여 씨 아저씨의 친구 박 씨 아저씨, 박 씨 아저씨의 딸, 여 씨 아저씨의 또 다른 친구 유곤 씨, 유곤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렇다면 은교의 아버지, 무재의 아버지, 여 씨 아저씨의 아버지……. 불행은 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개인적인 ‘사정’의 형태와 구조적인 ‘폭력’의 형태를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백의 그림자』 속에서는 모두가 불행하다. 그렇다면, 불행이 이토록 ‘일반적’일 수 있단 말인가. 본문 중에 머릿속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는 구절들이 있었다.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버리는’ 세상, ‘언젠가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세상, ‘빚을 갚기 위해 빚을 지고,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전심전력으로, 그 틈에 점점 불어나는 먹고 사는 비용의 빚을 져 가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볼까. 이런 세상에서 불행이 이토록 일반적인 것이 정녕 이상한가. 


이런 세상이라면 나만 불행할 리가 없었다. 누군가 불행의 우열은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리고 여러 정황들을 세세하게 비교한다면 불행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열을 가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토록 모두가 아픈 세상에서 불행의 우위가 무슨 소용인가. 내가 원한 건 우월한 고통이 아니었다. 넌 절대 모를 거야, 라고 말했던 건 불행의 일인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의 고통이 온전하게 발견되길 바랐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발견되는 것이었다. 개인들의 넘쳐나는 고통들 틈에서 나의 고통 또한 선명하게 발견되길 바랐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는 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지자, 너의 불행은 어떤 모양이니, 그것이 궁금해, 와 같은 말을 바라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감히. 


『백의 그림자』가 지켜내려고 했던 것 또한 ‘불행의 단독성’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불행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절대로 평범하지는 않다. 소설은 끝끝내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불행도 간과되어서는 안 돼. 소설은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낸다. 어떻게. 소설 속 인물들이 저마다의 불행에 꼼짝하지 못하고 완전히 무기력해질 때, 그들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그림자가 일어서자 주인의 입이 굳게 닫힌다. 그림자가 주인 대신 말을 한다. 주인의 입이 먹힌다. 그림자가 주인을 완전히 잡아먹는다. 잡아먹히면 모든 게 끝이다. 이렇듯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설정은 개인의 고통, 아픔, 불행의 상투화를 피하기 위한 작가의 몸부림이다. 숱하게 불어나는 불행들 속에서 저마다의 불행을 하나씩 선명하게 발견해내기 위한 작가의 억센 노력이다. 


불행을 견디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무재와 은교는 서로의 곁에 있어 줌으로써 각자의 불행을 버티어 낸다. 이들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한 사람이 계속되는 불면으로 힘들어할 때 다른 한 사람이 어제도 잠을 자지 못했냐며 염려하는 사랑이다. 끈질기게 일어서서 따라붙는 그림자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무엇보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39쪽)


나의 연인을 유일무이한 단독자로 만들어내는 사랑이다. 


나는 내게 닥친 불행을 홀로 잘 버텨왔다.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버틸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설을 읽은 후 생각했다. 언젠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이들처럼 사랑하고 싶다. 백(百)개의 검은 그림자를 백(白)색의 그림자로 변모시킬 수 있는 건, 서로의 불행을 유일무이한 불행으로 발견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줄 때가 아닐까. 백(白)색의 그림자는 실로 그림자가 아니다. 이들의 사랑에 진심으로 경탄을 표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